부르고뉴, 황금이 익는 돌투성이 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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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고뉴 와인은 같은 밭이라도 구획에 따라 각기 다른 맛을 낸다.

프랑스 파리에서 자동차를 타고 남동쪽으로 2시간가량 달려 도착한 샤블리(Chablis). ‘꿈의 와인’이란 세계인의 찬사를 한몸에 받고 있는 부르고뉴 와인의 대표적인 산지다. 지난 10일 오전 7시30분. 어둠이 걷히는 드넓은 포도밭 곳곳에 농부들이 가지치기에 열중이다. 키와 굵기가 어른 팔뚝만 포도나무엔 가지 하나만 달랑 남았다. 수령이 45년이나 됐단다. 나무의 줄기는 심하게 비틀어지고 여기저기 패었다. 평생 밭일을 해온 노인의 골 깊은 주름 같다. 뿌리를 내린 돌 투성이 땅을 보니 알겠다.

샤블리 와인 생산업자인 티에리 아믈랭(Thierry Hamelin)은 “줄기는 그렇게 보여도 뿌리는 땅 밑의 흙과 바위를 뚫고 10m 이상 내려간다. 깊은 뿌리가 토양의 영양성분과 미네랄을 끌어올려 올 가을엔 훌륭한 포도송이를 맺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르고뉴(프랑스) 글·사진=유지상 기자

부르고뉴 와인은 ‘테루아(Terroir)’다

같은 날 오전 10시부터 샤블리 그랑 오세루아(Chablis Grand Auxerrois)에서 열린 ‘레 그랑주르 드 부르고뉴(Les Grands Jours de Bourgogne·부르고뉴의 좋은 날들)’ 행사의 샤블리 와인 시음장. 비가 내리는데도 35개 나라에서 온 1800명이 북새통이다. 현지의 와인 전문가들도 있지만 외국에서 온 업계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올해 새로 내놓는 2006년 빈티지를 맛보려는 사람들이다.

“석회와 진흙, 그리고 굴껍질 화석이 갖고 있는 미네랄 성분의 맛이 두드러지네요. 샤블리 지역의 테루아를 확실히 표현해 5~6년 뒤에 마시면 더 가치를 발휘하겠는데요.” 장 마르크 브로카르(Jean Marc Brocard)의 2006년 발뮈르(Valmur) 샤블리 그랑크뤼 와인을 맛본 일본인 와인 강사 하시모토 노부히코의 말이다. 시음 행사에 온 사람들은 부르고뉴 와인을 이야기할 때 테루아를 꼭 앞세웠다. 프랑스 양조학자 르노 마르탱(Renaud Martin)은 “부르고뉴 와인 맛을 결정하는 요인은 테루아”라고 강조했다. 테루아는 우리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쉽게 풀어본다면 포도를 생산하는 토양의 환경을 말하는데, 부르고뉴 사람들이 내리는 정의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와인을 만드는데 영향을 주는 모든 것이 테루아란다. 르노 마르탱은 “포도밭의 토양 성질, 포도밭의 입지 환경, 포도의 품종, 기상과 기후는 물론 와인을 재배하는 농부와 양조자까지 포함한 개념”이라고 설명했다. “테루아를 잘 표현했다”는 말은 “포도밭의 특징을 잘 담아냈다”는 칭찬이다.

부르고뉴 와인협회 수출매니저 넬리 블로피카르(Nelly Blau-Picard)는 “부르고뉴의 포도밭은 척박하기 그지없다.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더워 다른 지역보다 자연환경이 무척 다르다. 이런 상황을 이기고 세계 최고의 와인을 빚어낸다”고 말했다.

부르고뉴 와인은 쉽지 않다.

부르고뉴 와인은 두 가지 포도품종으로 만든다. 레드와인은 피노누아(Pinot Noir)로, 화이트와인은 샤르도네(Chadonnay)로 만든다. 단순해 보이나 부르고뉴 와인은 들어갈수록 미궁에 빠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두 가지 품종에서 펼쳐지는 테루아가 아주 세분화돼 있기 때문이다.

샤토 드 라투르 프랑수와 라베(Francois Labet) 사장은 “그랑크뤼 포도밭의 하나인 클로 드 부조(Clos de Vougeot)의 경우 전체 면적이 51ha인데 85명의 재배업자가 나눠서 경작한다”고 말했다. 포도밭은 단순히 금을 그어 나눈 것이 아니다. 토질은 물론 경사면까지 일일이 따져 특성별로 구분했다. 그러니 같은 포도밭에서 적어도 서로 다른 85가지 와인이 만들어진다는 얘기다. 그러다 보니 생산량이 무척 적다. 일년에 4000병을 만들어 아는 이들끼리 나눠 마시는 곳도 있다. 구경조차 힘드니 구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고, 높은 값에 팔릴 수밖에 없다.

부르고뉴 와인을 보다 빨리 알려면 지리적 이해가 우선이다. 병의 라벨에 포도품종 대신 프랑스 시골의 지역·마을·밭의 이름이 적혀 있기 때문. 부르고뉴 지방은 최북단 샤블리에서 남으로 마콩(Macon)까지 이어지는데, 샤블리(Chablis)·코트 드 뉘(Cote de Nuits)·코트 드 본(Cote de Beaune)·코트 샬로네즈(Cote Chalonnaise)·마코네(Maconnais) 등 5개 큰 지역으로 나뉜다. 지역마다 수많은 마을이 흩어져 있다. 예를 들어 코트 드 뉘에는 즈브레 샹베르탱(Gevrey Chambertin)·부조(Vougeot)·본 로마네(Vosne Romanée) 같은 유명한 마을이 수두룩하다. 이곳에서 나폴레옹 1세가 즐겼던 샹베르탱과 ‘와인 중의 와인’이라는 로마네 콩티가 나온다. 샹베르탱이나 로마네 콩티는 그 마을의 그랑크뤼 포도밭 이름이다. <그림·표 참조>

부르고뉴 와인의 맛

부르고뉴 화이트 와인의 대표주자는 샤블리다. 갓 빚은 와인은 맑은 노란색인데 나이를 먹을수록 짙어져 황금색이 된다. 풍부한 과일향과 산뜻한 산미가 매력적이다. 오크통에서 숙성한 것은 버섯향 등이 넉넉해 고기 요리와 곁들여도 좋다. 피노누아로 만든 레드와인은 ‘쨍’한 붉은 색이 시선을 확 잡는다. 오래될수록 갈색이 돌면서 투명감을 주지만 가볍지 않다. 전체적으로 베리나 자두 등 포도와 닮은 과일향이 강한 편이다. 프르미에 크뤼 2006년 빈티지의 경우도 신선하고 활력이 넘쳐 그랑크뤼에 뒤지지 않는다. 오크통 숙성을 거친 올드 빈티지는 카라멜·모카 맛에 가죽향이 은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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