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해질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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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해질녘’-다니카와 슌타로(1931~ )

아무도 없는 옆방에서

누군가 부른다 마치 나인 것처럼

나는 서둘러 문을 연다

이쪽은 어두운데

그곳엔 밝게 햇살이 비치고 있어서

지금 막 누군가 떠나간 참인 듯

그림자가 슬쩍 눈을 스친다

하나 내가 좇으면 이미 아무도 없고

별다를 것 없는 해질녘이 된다

꽃병엔 먼지가 쌓였다

창문을 여니 하늘이 밝은데 거기서도……

누군가 부른다 나처럼


해질녘, 누가 날개 한 벌을 벗어놓고 갔을까. 빈방에서 무릎을 싸안고 어둠에 잠겨가면, 이쪽과는 달리 옆방에는 밝게 햇살이 비칠 것만 같다. 서둘러 문을 열면 지금 막 떠나간 참인 듯 밝은 햇살 속에 날개 그림자가 비친다. 창문을 여니 꽃병에 쌓인 먼지가 저녁 대기 속에 떠간다. 거기서 푸르스름한 성대를 울리며 애타게 부르고 있다, 누군가가 나처럼.

<박형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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