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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혜진과 예슬에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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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날 교회에서 돌아오는 길이었겠지. 전날 성탄절 연극 때 웃겼던 친구 얘기며 받은 선물 얘기며 할 말이 얼마나 많았겠니. 녹색 신호등에도 혹시 차가 오지 않을까 손을 꼭 잡고 함께 길을 건넜을 너희 모습을 상상해 본단다. “차조심해라” “낯선 사람 따라가지 마라”란 말을 엄마·아빠로부터 얼마나 들었겠니. 우리나라 어른들이 아무리 나쁜 짓을 많이 해도 너희는 여전히 호기심 많고 친절하고 순진한 어린이였지. 제주에서, 부산에서, 서울에서 많은 어린이가 너희처럼 아주 아프게 죽었단다. 그때마다 어른들은 상실의 고통으로 비통해하고, 나쁜 짓을 저지른 범죄자들에 대한 분노로 크게 한 번씩 흥분했었지. 그리고 곧 ‘우리 애는 그런 끔직한 일을 당하지 않을 거야’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며 각자 마음을 진정시켰단다. 너희를 지켜내는 일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많았기 때문에 대통령도, 정치인도, 선생님도, 동네 사람들도 또다시 아주 바빠졌지. 어른들이 ‘우리 아이 최고 만들기’의 주술에 걸려 몸과 마음이 얼마나 바쁜지 너희들도 알지?

우리는 너희의 죽음에 대해 아직 확실히 아는 것이 없단다. 어린이에게 안전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우리나라가 진지하고 적극적인 노력을 벌여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뿐이야. 15년 전에 미국 뉴저지주에 메건이란 일곱 살 여자아이가 살고 있었대. 사진으로만 봤는데 너희처럼 정말 맑고 예쁘더구나. 메건은 옆집 아저씨가 강아지를 보여준다고 해서 따라갔다가 너희처럼 아프게 죽었단다. 그래서 너희에겐 어려운 말이겠지만 아동을 ‘성폭행’하고 유괴하는 일을 막는 것이 ‘시민의 의무’라고 생각한 동네 사람들이 바쁜 일을 멈추었대. 아프게 죽는 어린이들이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아주 강한 법을 만들자고 했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메건법이란다. 메건법은 힘 없고 순진한 아이들을 음습한 욕망으로 괴롭히고 아프게 한 어른들이 또다시 그런 짓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큰 벌도 주고 감시를 하는 것이래. 어린이에게 이상한 짓을 하는 것을 비디오에 담아 팔아도 아주 오랫동안 벌을 받아야 한대. 아동 성폭행은 가장 취약한 어린이의 몸과 마음을 평생 동안 아주 아프게 하는 거라서 가장 나쁜 범죄라는구나. 우리나라도 이런 나쁜 짓을 저지른 사람에게 전자 팔찌를 끼우고, 사진을 공개한다고 했지만 아직도 그 사람의 인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며 반대하는 어른이 있단다. 아이들의 생명보다 부모와 사회의 비통함보다 그 사람의 인권이 중요하대. 흉악한 범죄자를 사회가 감시해 다시 그런 짓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 그 사람에게도 가장 인간적인 일일 텐데 말이야.

지금 어른들은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잘 산다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혼란 속에 빠져 있단다. 심지어 너희를 24시간 가동되는 학원이라는 공부 공장으로 데리고 와서 돈을 벌려는 끔찍한 생각을 하는 어른들이 설치고 있단다. 그 어른들은 놀이터와 거리와 동네에서 뛰어노는 어린이와 소년·소녀들을 시멘트 골방에 가둔 후 안전하게 봉고차로 집앞까지 데려다 주겠다며 불안한 엄마·아빠들을 꾀고 있단다. 어른들은 막연하게 불안해만 하고 깊이 생각하지 않는 습관이 배었단다. 아주 못된 짓을 하는 어른이 거리에서 배회할까봐 너희들을 가둘 생각만 하지 그 어른이 돌아다니는 것을 막을 생각은 하지 않는단다. 혜진아 그리고 예슬아, 너희들이 한국 사회의 부자 되기의 허황된 주술과 차갑게 멈춰버린 어른들의 ‘얼음땡’ 심장에 요술을 부려다오. 너희 요술이 우리를 깨우면 상실의 아픔으로 ‘마음앓이’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무력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4월에 열리는 총선의 흥분 속으로 너희들의 죽음이 묻혀버리지 않을 수 있게 도와다오. ‘똑똑한 아이’ 만든다며 어른들이 쉽게 박탈해 온 아동의 권리에 대해 진지하게 공부하고 토론할게. 너희에게 거리와 놀이터와 운동장을 빼앗아서 미안해. 너희의 생명, 행복, 자유를 어른들이 선점하고 탈취해서 미안해.

김현미 연세대 사회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