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육 1번지 강남 ‘방과후 학교’ 실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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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동희(15·서울 영동중 3년)양은 지난해까지 학원에서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 영어·수학을 공부했다. 학원비가 한 달에 50만원 이상 들었다. 김양은 17일 오후 서울 서초동 영동중의 ‘방과 후 거점학교’에 있었다. 학교에서 국·영·수·사·과 다섯 과목을 배운다고 했다. 수강료는 20여만원. 김양은 “수강료도 싸고 수능 문제를 출제한 선생님 등 학원보다 실력 좋은 선생님이 잘 가르쳐 준다”고 말했다.

#2. 이모(15·언북중 3년)양은 부모님이 별거한 뒤 고모와 함께 산다. 집에서 혼자 공부하는 게 버겁지만 학원 다닐 형편이 안 된다. 이양은 며칠 전 학교 선생님께 편지를 썼다. “방과 후 학교를 수강하고 싶었지만 고모께 수강료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습니다. 포기하던 차에 ‘금전적으로 어려운 학생들은 학교에서 지원해 준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기회를 주시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는 내용이었다. 이양은 자유수강권을 이용해 방과 후 수업을 들을 수 있게 됐다.

서울 강남의 중학교가 사설 학원과 실력 경쟁에 나섰다. 사교육비를 줄이고 공교육의 신뢰를 되찾기 위해 ‘방과 후 거점학교’를 만들어 수준별 심화학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중·고교의 우수 교사와 학원 강사를 영입해 국어·영어·수학 같은 과목을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 가르친다. 수강료는 과목당 4만~5만원으로 보통 20만~30만원이나 되는 학원비보다 싸다. 재학생뿐만 아니라 다른 학교 학생에게 개방해 ‘거점학교’라 이름 붙였다. 강남교육청이 지난해 11월부터 올 2월까지 5개 중학교에서 실시한 뒤 이달부터 9개 중학교로 확대했다. 참여 학생은 5712명(2월 현재), 소속 학교만 37개교에 이른다. 서울시교육청은 다음 달부터 다른 지역 교육청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수준별 수업, 우수 교사가 열쇠=14일 오후 8시 서울 언북중학교. 기초·심화반으로 나뉜 교실마다 국어·영어·수학 수업이 한창이었다.

조원준(15)군은 “평소 시끄러운 친구들도 자기가 원해서 듣는 데다 수준에 맞으니 수업에 집중한다”고 말했다. 조창래(사회) 교사는 “동료 교사도 아이들의 눈이 너무 초롱초롱해 낮에 교실에서 봤던 같은 애들이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고 전했다.

교사진도 화려하다. 대부분의 거점학교는 교과서 저자와 경기고·국제고 등 고교 교사는 물론이고 EBS 강사, 논술학원 강사, 대미협력통역관까지 모셔 왔다. 영국 유학파나 박사 출신 교사도 있다.

◇타 학교·저소득층 학생도 포용=신사중 3학년 이규봉(14)군은 언북중에서 국어·영어·수학 수업을 듣는다. 이군은 “처음엔 다른 학교에 오는 게 어색했지만 선생님들이 신경을 많이 써준다”고 말했다. 이군처럼 이웃 학교에서 수업을 듣는 학생은 30% 정도다. 기초생활수급자 가정의 학생들은 1년에 30만원 한도 내에서 수업을 들을 수 있는 ‘자유수강권’을 이용한다.  

◇학원 이길까=학교의 ‘도전’에 학원들은 긴장하고 있다. 언북중 장오순 교감은 “오후 6시 강의를 시작하던 인근 학원들이 거점학교가 생긴 후 오후 5시로 앞당겼다”고 말했다. 그러나 방과 후 거점학교에는 수준별 교재가 부족하다. 교사들은 학생들이 낸 수강료 전액을 가져가지만 액수가 적다.

‘학교의 학원화’를 비판하거나 학교의 능력을 불신하는 이들도 있다. 강남교육청 이경복 교육장은 “수준 높은 수업으로 학생들이 학원을 찾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백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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