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미로찾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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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그러나 희경은 음모한 바가 있어 다시 숨을 가다듬고 양가집 규수 답지않은 제의를 했다.
『다름이 아니고 만일 당신이 내 대신 한 사람을 죽여준다면 난 당신의 권태를 없애는데 적극 도구가 될게요.원한다면 몸도 제공할 수 있어요.』 희경은 채영만 죽이고 나면 자기도 뒤따라죽을 거니까 무슨 약속이라도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건 안돼!난 한번 사람을 죽였다 하면 계속 죽여야 해.한번 피를 보면 저절로 가라앉을 때까지 절대로 멈추지 않거든….
』 『예쁜 여잔데 안되겠어요.강간하고 죽이면 재밌을텐데….』 거지가 다시 벌렁 드러누웠다.
『글쎄.한명은 안된다니까…내 속에서 잠들어 있는 죽음이라는 괴물을 깨우면 다시 잠들 때까지는 계속 재물을 갖다 바쳐야 해.』 희경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그렇다면 다른 재물을 더 찾아야 하는데 누가 있을까.이때 희경의 머리에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그래 그렇다면 그년을 그냥 죽일 게 아니라 두고두고 고통을 받다가 죽게 하는 것이다.그년은 지금 고아나 마찬 가지니까주위에 의지할 만한 사람들을 먼저 모조리 죽여버려 외로움에 시달리게 하는 것이다.그런 다음 그년을 칵 죽여버리면 그만한 복수가 어디 있겠는가.희경은 그년이 의지하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곰곰 생각해 봤다.흥신소를 통해 그녀에 대해서는 세세하게 알고 있었으므로 그녀 주위 사람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그러나 아무리 해도 마땅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기껏해야 영화사 사장이나 감독 정도인데 그런 사람들이야 쌔고 쌔지 않았는가.돈만 있으면 코미디 언도 감독하고 제작하는데….그렇다면 누굴 죽이면 좋을까.이때 희경의 머리 속에 정민수가 남긴 네통의 편지가 떠올랐다.그 편지 속에는 백지도 들어있었고 구구절절 그녀를 잘 부탁한다는 내용도 들어있었다.정민수는 나름대로그녀의 작품 세 계를 구축하는데 절대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4명을 꼽은 것이다.희경은 드디어 결심했다.그네들도 함께 죽이기로….그러면 적어도 다섯명은 죽일테니 이 사람 속도 좀 풀리리라.비록 걔들 인생이 불쌍하게도 생각됐지만 내 인생이 더 불쌍하고 살고 죽는 게 다 하늘의 뜻이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그래서 희경은 눈감고 잠자는 거지에게 자기의 살인 계획을 말했다.
희경이 온갖 연기와 감흥,눈물과 한숨을 쥐어짜면서 감동적으로 얘기를 했으나 거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가만히 보 니 콧물을 훌쩍이며 규칙적으로 콧구멍을 벌렁거리는 게 깊이 잠든 것 같았다.희경은 괜한 헛수고만 했구나 하는 생각에 멍하니 강물을바라보았다.내 주제에 복수는 무슨….저 멀리로 한강 유람선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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