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核 겨울잠’에 힐, 코너 몰리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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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호 11면

크리스토퍼 힐

북핵 협상이 또다시 중대 기로에 섰다. 지난해 말 북한의 핵 프로그램 신고를 둘러싼 교착으로 2단계 북핵 합의 이행 시한을 넘긴 지 석 달째. 13일 미국과 북한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국면 타개를 위해 밀도 높은 협상을 벌였지만 핵심 쟁점인 신고의 내용에 대해선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14일 제네바 회담과 관련, “형식이 아니라 실질적인 문제에 견해 차가 있어 즉각 돌파구가 마련될 것으로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제네바서도 돌파구 못 찾은 북·미회담

미국은 이번 협상에서 신고의 형식에 대해선 유연성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의장국인 중국에 내는 공개 신고서에는 국제사회가 제기하는 의혹에 대해 ‘인정한다’가 아니라 ‘이해한다’는 표현을 담는 식으로 북한의 체면을 살려 주는 방안이 제시됐다.

대신 북·미 간 비밀로 처리할 신고서는 플루토늄 핵개발과 농축 우라늄 핵개발 계획, 시리아와의 핵기술 협력 의혹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 담겨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북한은 이번 협상에서 기존 입장을 되풀이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은 협상이 끝난 뒤 “고농축우라늄 계획과 시리아와의 핵 협력은 과거에도 없었고 현재도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외교 소식통은 “합의가 쉽게 도출되진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번 회담에서 일부 진전이 있었고, 교착→양자회동→6자회담 재개라는 선순환의 선례가 있어 차후에라도 돌파구가 마련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부시 미 행정부 임기가 8개월밖에 남지 않았고, 한국의 새 정부가 들어선 이후 남북한 간 미묘한 긴장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북핵 불능화 및 신고 완료라는 2단계 합의 이행이 연내 어렵지 않겠느냐는 전망도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주목받는 이는 ‘협상가’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다. 정부 관계자는 “6자회담 수석대표인 힐의 입장이 정말 어려워졌다”고 했다. 워싱턴 조야에선 “북한이 제한적 핵보유국으로 가는 길을 힐이 열어주고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최근 김계관 부상을 만나기 위해 두 차례나 베이징을 찾았다 공개적으로 ‘바람맞은’ 것과 관련해서도 워싱턴의 눈초리는 싸늘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임설까지 나왔다.

실제 워싱턴의 정보지 등에서는 “힐이 5월 사임할 것 같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현재 북한과의 협상이 교착된 데 따른 좌절감 때문이라는 일본 소식통들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서울의 외교 소식통은 “힐이 다음 민주당 정부에서 일을 하기 위해 북핵 문제가 파국을 맞기 전 부시호(號)에서 내리려 한다는 소문도 있다”고 전했다. 올 11월 미 대선에서 민주당이 승리하면 리처드 홀브룩 전 유엔 대사가 국무장관이 되고 홀브룩이 각별히 신임하는 힐 차관보를 중용할 것이란 게 소문의 배경이다. 힐은 보스니아 내전 종식을 위한 협상 당시 회담을 이끈 홀브룩의 보좌관이었다. 정부 관계자는 “6자회담 과정에서 힐에게 불만을 가진 일본 측이 사임설을 유포한다는 분석도 있다”면서 “하지만 사임설이 나올 정도로 힐의 입지가 어려워진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부시 행정부 2기 라이스 국무장관 체제에 발탁된 힐은 2002년 말 2차 북핵 위기 발생 후 지속된 북·미 대치 국면을 극적으로 전환한 활성탄이었다. 그는 미국이 극도로 꺼리던 북·미 양자회담도 상부를 설득해 밀어붙였다. 힐은 2005년 7월 라이스 장관의 방중 선발대로 베이징에 가 김계관 부상을 오찬에 초대했다. 곧이어 6자회담이 1년 만에 재개됐고 북핵 해결의 포괄적인 원칙을 담은 9·19성명이 채택됐다.

힐은 제임스 켈리 전 차관보 등 과거 미국의 대북 협상 대표들과 달랐다. 익명을 요구하지도, 말을 아끼지도 않았다. 기자들은 힐을 6자회담 대변인으로 불렀다. 2005년 7월 24일~8월 7일(4차 6자회담) 미 대표단의 숙소였던 베이징의 세인트 레지스 호텔 로비는 그의 브리핑 장소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상황을 대체로 솔직하게 설명했다. 북한에 보내는 메시지이기도 했고, 워싱턴의 강경파를 의식한 언론 플레이이기도 했다. 강경파의 견제로 무산되기는 했지만 2005년 9·19 합의 뒤 평양행도 추진했다. 당시엔 힐의 후원 세력인 라이스조차 “자신을 너무 싸게 팔지 말라”고 만류했다고 한다. 힐은 마침내 지난해 두 차례나 평양을 찾았다.

직업 외교관인 힐의 이런 모습은 자신감에서 비롯된다. 힐은 보스니아 평화 교섭에서 상관인 홀브룩 보스니아 담당대사를 도와 22일간의 교섭 끝에 ‘데이턴 합의’를 이끌어냈다. “힐은 자신의 교섭력에 자신이 있었다. 주한 미 대사로 부임한지 1년도 안돼 협상가로 기용됐다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미 국무부의 한 외교관은 ‘힐이 중고차를 판다면 대단할 것’이라고 했다”(후나바시 요이치 『김정일 최후의 도박』)

힐의 메시지는 늘 긍정적이다.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는 말보다는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갔다’고 말한다. 13일 제네바 협상이 끝난 뒤에도 그랬다. 외교 소식통은 “힐은 항상 되는 쪽으로 얘기한다. 과하다 싶을 때도 있고 공약이 실제로 잘 안 굴러갈 때도 수차례 있었지만 결국은 됐다”고 강조한다. 2007년 1월 북·미 베를린 양자협의에서 북측에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에 묶인 북한돈의 해제를 약속했지만 기술적인 문제에 걸려 수개월 지체된 게 대표적 사례다.

당시 북한은 힐의 ‘BDA 해결 공약’ 불이행에 불만의 소리를 냈다고 한다. 이번에도 북한을 방문한 미측 인사들에게 김계관 부상은 “힐이 시리아 핵 협력설 문제는 미국 내 정보기관 간의 실랑이에 불과하니 큰 장애물이 되지 않을 것이란 말을 했는데 상황이 다르다”며 신뢰의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전해졌다. 자유아시아 방송(RFA)은 “김 부상은 또 ‘힐이 북한의 테러지원국 해제와 적성국 교역법 적용 종료 등의 약속을 하고도 지키지 않아 내가 곤란한 지경에 빠졌으며, 과거의 모든 핵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는 없으니 라이스 장관은 기대를 낮춰야 한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핵 협상이 교착에 이를 때마다 워싱턴 매파들과 언론은 비판을 쏟아냈다. 그는 2월 상·하원 북한 문제 청문회에 참석해 “비판을 별로 민감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내가 상부 지휘 없이 멋대로 움직이는 프리 에이전트(Free agent)란 기사를 봤는데 나는 라이스 장관의 철저한 지지와 지휘를 받고 있다”고 강조했다.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최선의 외교는 국내에서 시작돼야 한다. 직업 외교관으로서 이를 잘 다루지 못하면 내가 외국인과 뭘 하겠는가”라며 자신감을 보이기도 했다.

힐의 사임설과 관련, 가능성은 낮다고 보는 게 외교가의 시각이다. 다음 행정부에서의 입지를 위해서도, 협상가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도 북핵 2단계 합의는 깔끔히 마무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부시 대통령과 라이스 장관 역시 힐과 함께 북핵 문제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려는 의지가 강하다고 한다. 정부 당국자는 “중국 역시 8월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북핵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설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여름 전에는 어느 정도 진전이 있을 수 있다”고 기대했다. 적어도 올여름이 되기 전 힐의 운명도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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