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미로찾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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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희경은 그의 눈길이 스쳐가는 곳마다 소름이 돋는 것같았다.거지 주제에 어딜 넘보긴….내가 이래봬도 얼마 전까진 병원장 사모님이었는데 말이다.
『각종 직업을 가진 여자들을 종류별로 다 경험해봤지만 나중엔잘 서지도 않더군…그래서 강간을 시작했지.돈주고 사먹는 과일보다 몰래 서리해 먹는 과일이 더 맛있을 거라는 생각에서…당신,인생의 절정기에 오른 사람들이 왜 걸핏하면 자살 하는지 아우?』 『인생의 절정기에 올랐는데 자살해요?』 『왜 「설국」을 쓴일본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와바타 야스나리도 자살했잖아.바로 권태때문이라구…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왜 웰링턴에게 졌는지 알아?』 『….』 『권태때문에 져준거지.거기서 또 이겨 유럽의 황제노릇을 하면 또 지옥같은 권태 속에 시달려야 하거든…그래서 전쟁 와중에 낮잠도 자고 여유를 부렸던 거야.황제가 돼서 더 할일이 없어 권태에 시달리는 것보다 차라리 엘바 섬에서 굶어 죽는 게 낫거든….』 희경은 기도 안막혔다.나폴레옹이 웰링턴에게일부러 져 줘.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한 역사학자 단 한 명이라도있으면 나와보라고 해!무식하기는….그러나 희경은 겉으로는 내색을 안하고 진지하게 물었다.
『정민수씨 얘기나 해줘요.권태론은 나중에 강의하고…그 사람 왜 죽었대요?』 『당신이 잘 알거라던데…당신이 마음의 준비를 했기 때문에 자기는 마음놓고 죽는 거라고….』 희경은 갑자기 말을 잃었다.어디선가 장도리가 날아와 머리 한가운데를 강타한 것같았다.희경은 다시 쓰러지려는 심신을 억지로 가누면서 이를 온통 꽉 깨물었다.만일 내가 또다시 태어난다면 다시는 정신과 의사와 결혼하지 않으리라.사람이 속아주는 맛이 있어야지.사사건건 분석하고 짐작하고 미리 알아채버리면 도대체 어떻게 살란 말인가.그러나 희경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솟았다.그 사람 정말좋은 남자였는데….아니 정말 사랑한 남자였는데….그 놈의 장모님과 의료보험조합만 아니었어도 우리 사이에 이런 일은 안벌어졌을 텐데….그냥 확 폭탄을 안고 보험조합으로 뛰어들까 보다.거지는 잠시 당혹해하는 희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괴로움이 남아 있다는 건 좋은 일이지.괴로운 만큼 권태도 저 멀리 있을 테니까….』 『약올리지 말아요!』 희경은 꽥 소리를 질렀다.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거야,뭐야! 이때 갑자기 희경의 어깨를 강한 힘이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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