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 첫 탄핵 정국] 한나라 "할까… 말까… 해보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3면

▶ 박준 민주당 원내행정실장(左)이 9일 노재석 국회 사무처 의사국장에게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제출하고 있다. [김태성 기자]

2004년 3월 9일 오후 3시47분.

국회 본관 6층 의사국장실에 한나라당 원내행정실 홍종용 부장과 민주당 박준 원내행정실장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주저없이 노재석 의사국장에게 책 두 권 분량의 두툼한 서류를 내밀었다.

서류 표지에는 '대통령(노무현) 탄핵소추안'이란 제목 밑에 '헌법 65조 및 국회법 130조 규정에 의해 대통령 노무현의 탄핵을 소추한다'라고 적혀 있었다. 발의자는 홍사덕.유용태 의원 외 157명. 한나라당 내부의 진통을 보여주듯 발의자 명단은 빨간 펜으로 삭제한 흔적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같은 시간, 국회 예결위 회의장 한쪽에서 탄핵안 발의 대표의원 중 한 명인 한나라당 홍사덕 총무는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대한민국 헌정사 초유의 대통령 탄핵안 발의 장면은 이랬다.

한나라당이 이날 탄핵 발의를 결정하기까지의 과정은 진통의 연속이었다.

전날(8일)까지 탄핵안 발의를 주저하던 洪총무는 이날 오전 측근들에게 "이제는 의원 홍사덕이 아니라, 총무 홍사덕의 역할을 다하겠다"고 말해 강경 당론을 예고했다. 소장파 의원 등의 반대로 탄핵안 의결 숫자가 채워지지 않아 주저했지만 이미 이런 사정이 외부에 알려진 만큼 의결 여부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하지만 소장파 의원들의 반대는 거셌다. 오전 11시 洪총무는 안상수.박종희 의원 등 10명의 소장파와 만났다. 洪총무는 "솔직히 탄핵선(재적의원 3분의 2인 180명)을 넘기기는 어렵다"며 "그러나 盧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이 사과하지 않는 만큼 그냥 묵과할 수 없다"고 설득했다. 하지만 安의원 등은 "지금은 시기상조다. 국민 여론도 그렇다"고 반박했다.

점심까지 함께한 두시간여의 논의에서 洪총무는 "일단 오늘 발의한 뒤 열린우리당이 저지하면 대국민 결의문을 발표하고 국면을 마무리짓자"고까지 설득했지만 소장파는 고개를 저었다.

진통은 오후 1시30분 열린 의원총회로 이어졌다. 영남권 의원들과 수도권 의원들로 양분돼 치열한 찬반 토론을 했다.

수도권의 권영세.장광근 의원 등은 "통과될 가능성이 없으니 발의 안 하는 게 낫다"고 반대했다. 전재희 의원은 "대통령에 대해 국법준수 결의안을 내자"고 했으며, 남경필 의원은 "탄핵안을 발의하면 수도권은 다 죽는다"고 말했다.

반면 이강두.임인배 의원 등 영남권 의원들은 "야당이 야당다워야 한다"면서 "지도부는 밀어붙여라"라고 촉구했다. 김용균 의원은 "지금 盧대통령을 내버려두면 히틀러처럼 될 수 있다"며 "인조반정이나 위화도 회군 같은 결단을 할 시점"이라고 했다. 林의원은 南의원에게 "너 ×× 당을 나가"라는 욕설까지 퍼부었다.

강경론의 정점은 최병렬 대표였다. 崔대표는 "동네 여론은 과학적 여론이 아니다"라며 "여론조사 결과는 탄핵안 찬성이 높아지고 반대가 낮아지고 있다"고 역설했다. "여기서 좌절할 때는 아무것도 못한다"며 책상을 내려치기도 했다. 한나라당의 탄핵안 발의 당론은 이렇게 결정됐다.

한나라당 의원총회 결과만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민주당 지도부는 반색했다. 유용태 원내대표는 미리 준비해둔 탄핵 발의안 관련 서류를 의사국에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劉원내대표는 "자민련과 무소속 의원들을 최대한 설득해 탄핵안을 통과시키겠다"고 주장했다.

대통령 탄핵안은 오후 6시27분 국회 본회의에 정식으로 보고됐다. 열린우리당 김근태 원내대표가 의사진행발언에서 "탄핵안에 동조하는 것은 불의와 타협하는 일"이라고 호소했지만 야당 의석에선 메아리가 없었다.

박승희.박신홍 기자
사진=김태성 기자<tskim@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