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진기>눌러 여는 약병 도입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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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휘어진 포크를 단번에 바로 펴주고 고장난 세발자전거도 척척고쳐주시던 만능해결사」.
아버지의 크고 우람한 손은 어릴적 나의 우상이었다.
그러나 심장발작때 니트로글리세린 알약 하나를 꺼내지 못해 약병을 움켜쥐고 숨져야 했던 아버지의 손은 너무나 초라해보였다.
」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연재돼 많은 이의 심금을 울렸던 『아버지의 손』이란 논픽션의 일부다.
아버지는 문맹자였고 따라서 약병 뚜껑에 쓰인 「눌러서 돌리시오」란 문구를 읽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대부분의 한국인에게 생소하기만 한 눌러서 돌려야만 열리는 약병. 하지만 미국등 선진국에선 이미 보편화된 방식으로 항생제등의사의 처방이 필요한 약품은 물론 위장약이나 아스피린같은 간단한 약제도 눌러 돌리는 약병에 넣어 판매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어린이를 어른들의 부주의로 비롯되는 약화(藥禍)사고로부터 보호하자는 취지에서다.
서울대병원과 세브란스병원등 국내 유명종합병원 소아응급실의 경우 매달 서너건이상의 어린이 약물사고환자가 내원한다는 것.
부모가 복용중인 항경련제나 수면제를 잘못 먹고 의식을 잃은채실려오는가 하면 어린이용 아스피린을 맛있다고 다량 복용해 놀란부모의 등에 업혀오는 경우도 많다.
어린이는 약물을 분해.배설하는 간과 콩팥의 기능이 성인보다 떨어지므로 소량의 약물이라도 때론 치명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눌러 돌리는 약병은 많은 비용이 소모되며 국내 기술로 제조하기 어려운 신기술인가.
정답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
플라스틱 약병의 돌아가는 나사홈 일부만 교정해주면 되는 초보적 기술에 불과하며 특수한 장치가 따로 필요한 것은 결코 아니다. 한심한 것은 보건복지부 담당공무원이나 제약협회 관계자는 이런 약병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어린이 손에 닿지 않게 약을 보관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약화사고를 부모의 책임으로 전가하려는 구태의연함만을 보였을 따름이다.
5월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나 진정 어린이의 건강과 안전을 생각하기보다 행사와 구호에만 그쳐왔던 우리들의 5월에 대해 어른들은 한번쯤 깊이 반성해야할 것이다.
눌러 돌리는 약병이 하루빨리 보급될 수 있길 바란다.
〈洪慧杰기자.醫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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