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정글속 日패잔병 30년만의 투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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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혼을 상징한다는 '사무라이 정신'은 외국인들이 보기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이 많다. 천황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목숨도 기꺼이 바치고, 투항이나 항복을 최대의 죄악이라 가르치는 '사무라이 정신'은 태평양전쟁의 일본군 패잔병 오노다 히로오(小野田寬郎)로 하여금 27년간 고립된 삶을 선택케 했다.

태평양전쟁 당시 미군의 상륙에 저항해 밀림속으로 달아났던 오노다 전 일본군국소위는 전쟁이 끝나고 27년이 지난 1974년 오늘(3월10일)에서야 비로소 투항했다. 52번째로 맞는 생일에 문명 세계로 돌아온 그는 어째서 그렇게 오랫동안 숨어살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나는 군인이다. 나는 오직 명령에 따를 뿐이기 때문에 명령 없이는 항복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사연인즉, 44년 첩보대의 일원으로 루방섬에 갔던 오노다에게 그의 직속상관이 '부대가 전멸하는 한이 있더라도 투항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 명령에 따라 일본의 패전을 모른채 고즈까 긴시끼 일병과 함께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즈까 일병은 72년 10월 필리핀 경찰의 총격으로 사살됐다)

고즈까 일병 사살 사건으로 오노다의 생존사실을 확인한 일본정부가 수차례 현지에 수색대를 파견, 수색했으나 그는 저항을 계속했다. 더구나 루방섬에서 우연히 만난 일본 관광객 청년이 패전소식을 알렸지만 그는 미국의 허위선전이라며 전쟁 당시 직속상관의 명령이 없는 한 미군과 계속 싸우겠다고 한 것으로 전해졌다.

오노다는 결국 그해 오늘 상사가 직접 내보인 투항명령서를 보고서야 필리핀 공군에 정식으로 투항했다. 당시 그는 일본 99식 소총 한 자루와 칼 한 자루·군복 및 몇 점의 옷·취사도구·회전전등·커피·사탕·소금 등과 식기 4개와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가지고 있었고 건강이나 정신상태가 모두 양호했다.

한편 당시 루방섬의 주민들은 일본 패잔병들이 30년동안 이 섬에 숨어 있으면서 30명의 섬사람을 죽이고 곡식을 불사르고 약탈해갔다는 불편을 필리핀 정부에 진정하고 처벌을 요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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