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와 객석] 벨기에 현대무용단 '믿음(Faith)'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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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장 소리가 "쿵닥쿵닥!" 들릴 것 같은 원초적인 감성이 사회를 향한 칼날 같은 시선과 마주친다. 벨기에 현대무용단은 '파괴'를 알기에 '창조'도 안다.

막이 오르면 황폐한 무대가 관객의 상식을 깨뜨린다. 무대 양쪽에는 높다란 벽이 서 있다. 그 사이사이에 사람들이 독립적인 풍경처럼 담겨 있다. 그리고 배우들은 춤을 춘다. 아니 '요동친다'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 움직임은 무척이나 강렬하다. 아름다운 선을 그리며 관객들에게 날아가는 무용이 아니다. 오히려 가슴속에 담긴 심장을 꺼내 "쿵!닥!쿵!닥!"하는 '원초적인 박동'을 눈앞에서 보여주는 듯하다.

벽에 거꾸로 매달린 사람, 그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여자, 사랑에 빠져 섹스를 나누는 두 남녀, 모자를 벗기자 시체처럼 허느적거리는 사람,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들, 아들을 찾아 헤매는 어머니, 외로움에 떠는 영혼. 이 모두에 인간적인 감정과 사회적인 절규가 뚜렷이 녹아 있다. 배우들의 춤은 고통과 좌절, 사랑과 절망, 고독과 신념을 압축한 거대한 덩어리처럼 관객들에겐 충격으로 다가온다.

'도발'과 '선언'으로 대변되는 벨기에 현대무용단이 11~13일 LG아트센터에서 '믿음(Faith)'이란 공연을 올린다.

지난해 초연된 '믿음'은 유럽 현대무용계를 강타했던 작품이다. 4명의 가수와 3명의 연주가, 그리고 11명의 무용수와 배우 등 다국적 예술가들이 꾸리는 무대다. 뉴욕에서 터진 '9.11 테러'를 소재로 삼고 있다. '믿음'은 무용이면서 무용이 아니고, 연극이면서 연극이 아니다. 그 중간쯤이다. 그래서 단원들도 "'무용단'이라기보다 '무브먼트 시어터'라고 불리는 게 더 좋다"고 말한다.

벨기에 현대무용단은 굳이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않는다. 대신 절망과 상처가 배어있는 일상을 좇는다. 그 속에 담긴 진실을 담기 위해서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춤양식은 무척이나 '파괴적'이다. 기존의 문법은 여지없이 깨지고 만다. 대신 무한한 상상력이 그 여백을 채운다. 어찌 보면 즉흥적인 연극처럼 자유롭고, 어찌 보면 공식이 없는 공식처럼 열려 있다. 유럽의 무용팬들이 이들에게 열광하는 이유다.

안무가인 시디 라르비 셰르카위는 겨우 스물여덟살이다. 그러나 사회를 바라보는 예리한 시선과 현대무용.힙합.모던 재즈까지 아우르는 표현 방식은 "대담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02년 모나코 댄스포럼에선 세계적인 안무가들을 제치고 '니진스키상-최고의 젊은 안무가상'을 수상했다. 그는 "우리 작품이 현대 사회를 보여주는 작은 거울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셰르카위는 '믿음'을 '중세풍의 댄스 오페라'라고 칭했다. 그는 악보로 남아있는 중세음악과 말로 전해지는 각국의 민요를 한 무대에 녹였다.'공식'과 '비공식'을 비비는 식이다.

안무가는 이를 통해 벽을 무너뜨린다. 관객들이 사로잡혀 있는 아름다움과 추함, 사회적 문제에 대한 장벽과 편견을 향해 "과연 타당한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저명한 무용평론가인 로사 메이는 "하늘 같이 넓은 비전, 독수리 같이 날카로운 시선, 사회를 향한 열린 마음"이란 세 마디로 셰르카위의 안무를 평한 바 있다.

새로운 양식을 정신없이 따라가다 보면 '믿음'은 어느새 관객의 가슴 밑바닥까지 내려온다. 그리고 서서히 소용돌이치기 시작한다. 이라크 전쟁과 도시인의 고단함, 문화의 충돌 등 날카로운 주제들이 관객의 가슴에 팍팍 꽂힌다. 낯선 양식이지만 관객의 심장을 겨누는 주제의식은 시퍼렇게 날이 서있다. 02-2005-0114.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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