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 잡겠다”는 정부, 30년 전과 똑같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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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서민생활을 안정시키겠다. 이를 위해 서민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생필품을 선정해 수급상황 및 가격을 수시로 점검하겠다. 출고 조작이나 생산 기피, 유통 폭리 등 유통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는 강력히 단속하겠다-.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정확히 30년 전인 1978년 물가인상을 막겠다며 정부가 내놓은 물가안정 대책 내용이다(경제기획원, 경제백서 1979년판 390쪽에서). 그런데도 이 내용이 전혀 낯설지 않다. 물가를 안정시키겠다며 연일 이 정부가 내놓는 정책들과 글자 하나 틀리지 않아서다. 정부는 잇따라 서민생활을 안정시키겠다고 발표한다. 이를 위해 공공요금 인상을 최대한 억제하겠다거나 매점매석 품목을 고시하고 적정 수준 이상으로 재고를 갖고 있으면 처벌하겠다고 강조한다. 심지어 말을 안 들으면 국세청을 동원해 단속하겠다고 엄포를 놓는 수법도 정말 똑같다. 30년 전에도 국세청은 정부의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였더랬다.

30년 전과 똑같은 건 이뿐만이 아니다. 국민을 섬기는 정부가 되겠다는 다짐이야 누가 나무라겠는가. 문제는 어떻게 실천하느냐인데, 이 정부는 시장을 찾고 건설 현장을 방문하고, 공장을 견학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예전 3공화국이나 5공화국 때 정말 많이 보던 모습들이다. 대통령이 먼저 하고 국무위원들이 전부 다 따라 하는 것도 똑같다. 장관들이 찾은 현장의 근로자들이 ‘쇼하는 것 같다’ ‘전시행정의 표상이다’라는 불만을 터뜨렸다는데, 이 역시 30년 전과 다르지 않다.

10~20년 전에 듣던 얘기들도 자주 나온다. 경제정책 수장이 환율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기업의 경쟁력 상실을 막겠다고 하고, 공기업의 소유권은 넘기지 않고 경영권과 민간에 이양하는 어정쩡한 민영화 방식을 추진하겠다고 선언한다. 김영삼(YS)정부 시절 한참 나오던 얘기들이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확확 바뀌는데, 어떻게 정부가 하는 짓은 이처럼 전혀 달라지지 않았을까.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제2차 석유위기 이후 경제부처는 30년 동안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그렇다면 지금쯤은 이 같은 비용 상승형 물가 상승에 능수능란하게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가장 좋기로야 정부가 진작부터 세계적인 유가와 곡물가격 인상을 예상하고 적극적으로 대비책을 세워놓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인플레이션을 행정력으로 막겠다는 발상은 오래전에 버렸어야 한다. 아무리 장관이 전시행정을 하고, 국세청을 동원해 엄포를 놓고, 요금 인상을 행정력으로 억누른다고 해도 인플레이션을 막을 수 없다는 건 상식이다. 인플레이션 억제가 더 중요한 정책적 과제라면 경기침체를 감수해야 한다는 것도 상식이다. 당연히 고금리나 유동성 축소가 해법이다. 하기야 이 간단한 상식을 경제부처 공무원들이 모를 리 없을 게다. 문제는 이렇게 할 경우 이 정부의 747 경제공약이 공약(空約)이 될 위험에 처한다는 데 있다. 욕심이 지나치면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법. 30년 전의 구태가 이 정부에서 자꾸 재연되는 게 이 때문이라면 해법은 욕심을 버리는 수밖에 없다. 선택과 집중이 오늘날 기업경영의 핵심이라는 걸 경영자 출신인 이명박 대통령이 모를 리 없다. 

김영욱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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