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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택시비 갖고 빨리 나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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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새벽 2시 강남의 한 아파트 촌. 늦은 밤 고요함을 깨는 소리가 있었다. 택시기사와 승객이 싸움을 벌인 것이다. 문제는 카드였다. 승객 K(37)씨는 신용카드 결제가 되는 택시인 것을 분명 확인하고 차에 탔는데 택시기사가 국민카드는 결제가 안 되니 현금을 내라고 했다. 실랑이는 30여 분간 계속됐다. 결국 K씨 부인이 현금 2만원을 가지고 나와 택시비를 치르고서야 주변은 다시 조용해졌다.

회사원 L(31)씨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바쁜 업무 시간에 쫓겨 급히 택시를 탔는데 몇 번이나 차를 갈아타야 했다. 타는 택시마다 “카드결제 되느냐”고 물어보면 “국민카드 외에 다 된다”고 대답하는 것이다. 국민카드만 사용하는 L씨는 결국 시간을 허비하다 지하철역으로 발길을 돌렸다.

L씨는 “당연히 모든 카드를 사용할 수 있을 줄 알았다”며 “국민카드만 안 된다니 나 같은 사람에겐 카드결제 서비스가 무용지물 아니냐”며 허탈해 했다.

서울시와 결제대행업체인 한국스마트카드가 주관하는 ‘택시요금 카드결제 서비스’ 에 국민카드가 참여하지 않아 소비자들이 불편을 겪고 있다. 승객뿐 아니라 택시기사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승객들이 카드사나 한국스마트카드 대신 당장 눈앞에 보이는 기사들에게 불만을 토해 내기 때문이다.

브랜드 콜택시를 운행하는 B(54)씨는 “수수료는 수수료대로 내고 욕은 욕대로 먹는다”며 “택시기사도 넓은 의미로 카드사 고객인데 억울하다”고 운전대를 쳤다.

“수수료 책정은 카드사 권한”

지난해 3월 22일 처음 시범사업을 시작할 때 참여한 카드사는 수협·롯데·현대·삼성· BC 등 5개사였다. 9월부터 본 사업을 시작하면서 신한·외환·하나 등 국민카드를 제외한 모든 카드사가 서비스에 참여했고, 11월부터 마스터·비자 등 해외 카드도 동참했다. 씨티카드는 얼마 전 한국스마트카드와 협의를 끝내고 전산 시스템을 손보고 있다.

한국스마트카드는 “지난해 말 국민은행이 참여 의사를 밝혀 현재 협의 중”이라고 밝혔다. 업계에서는 협의 과정에서 수수료 문제에 대한 의견이 달라 논의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이 같은 협의는 1년여 전에도 있었다.

당시 국민은행은 서비스에 불참하는 이유로 두 가지를 들었다. 첫째는 ‘수수료 책정 체계’다. 한국스마트카드는 서울시와 사업협정을 맺을 때 택시와 카드 종류에 관계없이 2.4%의 수수료를 적용하기로 했다. 하지만 국민은행은 수수료는 카드사 내부적인 자체 기준에 따라 정하는 게 옳다며 일괄적용은 카드사 고유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했다.

또 다른 이유는 택시를 가맹점으로 받아들이면 일반 가맹점으로 하느냐, 교통 가맹점으로 하느냐에 따라 담당 부서가 달라지는데 내부적으로 조직이 정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국민은행은 이에 대해 “서비스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는 결제를 대행하는 밴(VAN) 업체가 기준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단순한 수수료 문제가 아니라 고객의 금융 정보를 함부로 다룰 수 없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하지만 밴 업체에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국민은행이 말하는 밴 업체는 바로 한국스마트카드다. 위의 두 가지 이슈 중 하나인 수수료 책정이 문제가 되었다는 얘기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버스, 지하철 카드결제 수수료도 비슷한데 수수료 때문이라면 뭣 때문에 택시사업만 안 하겠다고 했겠느냐”며 “절대 수수료 문제가 아니다”고 완강히 부인했다.

현재 국민카드를 사용할 수 있는 택시도 있다. 개인이나 택시회사가 가맹점으로 가입한 곳인데 이곳 택시는 한국스마트카드를 통하지 않고 결제한다. 일부에서는 국민은행이 서울시와 한국스마트카드 사업과 별개로 자체적인 택시요금 결제 서비스를 시행하려고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수수료 2.4% 중 0.9%, 1.5%가 각각 한국스마트카드와 카드사의 몫이 된다. 서울시 운수물류과 담당자는 “국민카드가 가입하지 않은 것은 수수료 부분에서 타협이 안 돼서 그런 것으로 알고 있다”며 “1.5%라는 수수료가 너무 낮아 수익이 나지 않는다고 하지만 택시요금 카드결제 서비스는 공공사업이고 택시 사업자들의 수익이 열악해 수수료를 더 올리면 반발이 심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카드로 결제할 수 있는 택시에 스티커를 붙여 사용 가능 카드사를 명시했지만 시민들이 그것을 일일이 확인하고 차를 타기는 힘들 것”이라며 “승객이 타면 국민카드는 안 된다고 미리 공지하도록 교육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주도권’보다 국민 ‘편의’ 앞서야

2.4%라는 수수료는 어떻게 정해진 것일까. 한국스마트카드가 수수료 책정에 관한 세부 내용을 서울시 교통정책담당팀에 제출해 협의한 후 정한 것이다. 현재 버스 카드결제 수수료는 2.5%다. 금융권에서는 “2.4%라는 수수료는 너무 낮다”는 반응도 있다. 운수업종 일반 가맹점 평균 결제 수수료가 3%를 웃돌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낮은 수수료를 감수하고 공공사업에 뛰어들어야 하는 카드사들도 억울할 수 있다. 하지만 국민은행 관계자는 “2.4%라는 수수료 자체는 사업의 특성을 고려한 적정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그보다는 결정하는 과정에서 국민카드의 권리를 인정해 달라는 입장이다.

국민카드 가입자는 2007년 말 현재 852만 명으로 신한카드(옛 LG카드)에 이어 업계 2위다. 택시요금 카드결제율은 현재 7~8%를 오가고 있다.

서울시 운수물류과 담당자는 “요즘 택시요금을 카드로 결제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많이 알려져 카드결제율이 점점 늘고 있다”며 “올해 말까지 결제율 20%를 달성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서울 택시 7만2500대 중 카드결제 택시는 36% 정도다. 앞으로 카드결제율과 카드결제 택시는 점점 늘어날 전망이다.

한 카드사 관계자는 “카드사업은 수수료 수익도 중요하지만 복합적으로 가맹점 이용률을 높이는 것에 의미가 있기 때문에 택시사업에서 낮은 수익을 낸다고 꼭 손해를 보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다시 카드사의 수수료 싸움이 도마에 오르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라며 우려를 나타냈다.

택시요금 카드결제 서비스를 시작한 지 1년이 다 되어 간다. 국민은행은 1등 은행, 대한민국 대표 은행을 지향해 왔다. 그만큼 소비자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다. 국민은행이 “수수료 문제가 아니다”고 주장한 것처럼 이번 일을 단순한 숫자 다툼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업계 관계자는 “이번 택시요금 결제 수수료 사건은 문제의 한 단면을 보여준 것일 뿐”이라며 “카드사와 밴 업체의 밥그릇 싸움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고 업계의 관행을 문제 삼았다. 한국스마트카드와 국민카드는 현재 협의 중이고 늦어도 올해 상반기에 서비스를 시작할 계획이다. 주도권을 따지고 명분을 내세우기 전에 소비자의 권익을 챙기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있을까.

최은경 기자 (chin1chuk@joongna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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