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아이들어떻게자라나>6.청소년들 갈만한 놀이공간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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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공부하기가 싫고 짜증날 때마다 책을 오락기라고 생각해요.어른들도 속상하면 술 마시잖아요.』 서울의 한 「공부방」에서 모두 숙제를 하거나 책읽으며 공부하는 사이 혼자 초점없는 눈으로허공을 바라보고 앉아있던 성준이(국6).교사가 조용히 불러 이야기를 들어보니 1백원만 있어도 반나절쯤 오락기에 매달릴 수 있는 「오락 도사」 (?)다.여섯살 때부터 맞벌이하는 부모가 집을 비운 사이 7년째 오락실을 개근하다시피 했다는데 오락실에만 있으면 근심걱정을 잊는단다.
「공부방」은 소위 달동네로 불리는 도시 빈민지역에서 어린이와청소년들을 위해 민간단체들이 운영하는 방과후 프로그램으로 우리아이들의 「문화실조」현상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곳.마땅히 갈 곳도,할 일도 없는 아이들이 유해업소 주변을 맴 돌거나 본드흡입등의 위험천만한 비행.탈선을 하지 않도록 공부방 교사들은 안간힘을 쓰지만 이미 불건전한 향락문화에 유혹돼 경험한 아이들이 적지 않다.
『록카페에서는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게 최고의 매력이죠.춤추고 소리지르며 담배를 피우고 술 마셔도 뭐라는 사람이 없어 아주 편하거든요.』 며칠간 공부방에 나오지 않던 정호(중3).『공부하기가 싫고 부모님 잔소리도 성가시면 그렇게라도 풀어야 하지 않느냐』며 사뭇 당당하다.신촌.돈암동.압구정동.홍대입구에 가면 록카페 말고도 소주방.비디오방.만화방.노래방.당구장등 기분이 통하는 「우리끼리」 어우를데가 많아 마음에 쏙 든단다. 칸막이가 설치된 방에서 미성년자 관람불가의 비디오를 얼마든지 볼 수 있고,노래방의 화면도 훨씬 「화끈한 게 많다」는제2,제3의 정호들에게 꼭 그런데를 가야겠느냐고 묻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그 또래들이 마음놓고 즐기며 나무랄데 없는 또래문화를 익힐 문화시설이나 공간이 과연 얼마나 되는가.도서관.공연장.박물관.청소년회관등 바람직한 여가공간이나 프로그램은 거의찾기 어렵고 학교 주변의 유해업소만해도 여관.여인숙 3백12개,만화가게 1천1백41개,당구장 86개 ,전자오락실 3천1백10개등 5천개에 가깝다(93년 13대 정기국회 감사자료).이 유해업소들을 대상으로 한 청소년복지사범 단속현황을 보면 학대및혹사행위 3백73명,유흥업소 출입 묵인 7천6백22명,남녀혼숙묵인 4백82명,전자오락 장 출입 묵인 3천7백70명,불법만화및 불법비디오 판매.대여 4천1백29명등 2만6천3백여명이다(92년 검찰청).
건강한 여가생활로부터 소외돼 있기는 중산층 이상 어린이와 청소년들도 마찬가지.방과후 학원이니 개인과외에 시달리느라 마음껏뛰놀거나 취미와 소질을 살리며 윤기있는 정서생활을 하기 어려운요즘 어린이들의 가장 큰 고민은 시험성적,가장 하고싶은 일은 실컷 노는 것으로 각종 조사에서 대동소이하게 나타난다.
계층을 불문하고 가장 많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맹렬히 파고드는 것은 영상매체.그중에서도 가공할 폭력.음란물이 판치는 컴퓨터게임은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얼마나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지 상상하기도 끔찍하다.칼로 몸을 자르고,사람을 불에 태우고,사지를 발기발기 찢고….
지금까지 국내에 보급된 컴퓨터게임기만해도 업소용이 2백50만대,가정용이 2백만대를 각각 넘어섰으며 여기에 개인용 컴퓨터 보급대수까지 합치면 그야말로 온국민 누구나 언제,어디서든 손쉽게 즐길 수 있는 오락이 된 셈이다.그러나 통제가 거의 불가능한 그 프로그램의 내용과 수준은 어느모로 보든 우려할 만한 경우가 부지기수다.
서울YWCA가 중.고생들의 음란물 접촉실태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노골적 성행위를 묘사한 컴퓨터물이 53%며 비디오가 64%.음란비디오를 본 남학생의 48%와 여학생의 18%가 본대로행동하고 싶었으며 남학생의 7%는 그대로 해본 것으로 나타났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정체성이 갖춰지지 않은 사춘기 청소년들에게 유해음란물이 미치는 영향은 막대하다.특히 가정이 만연한 퇴폐향락문화로부터 청소년들을 보호하는 울타리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학교나 사회가 이들을 적절히 수용하지 못 할 때 이아이들이 갈곳은 어디인가.
우리 아이들의 정서와 윤리감각을 오염시키고 폭력적.반사회적 성격과 행동을 조장하는 퇴폐.향락 생활환경부터 바꿔줘야 한다.
공부를 잘하건 못하건,생활이 넉넉하건 어렵건,가서는 안될 곳,해서는 안될 일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삶의 여유 공간과 기회를 마련해주는 것이 학원.과외.시험보다 한결 시급하다는데 모두가 공감하고 대책을 서둘러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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