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저녁 숭실대 불문과 최재호 교수(사진)의 서울 방배동 집에 들어서니 고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스위스 요리 라클레트예요. 화이트·레드 와인과 다 어울리는 맛이죠.” 식탁 한가운데 치즈·빵·버섯·양파·고기 등이 수북이 쌓여 있다. 작은 팬에 치즈를 넣고 지글지글 끓을 때까지 녹인 뒤 빵이나 구운 야채와 함께 먹는 것이다. 최 교수가 손수 메뉴판까지 준비했다. 고급 양장지에 ‘오늘의 요리’‘와인 리스트’‘디저트’ 등을 한국어와 프랑스어로 적어 넣었다. ‘최재호 집에서 잊을 수 없는 ^^ 봄 밤’이라고 깜찍한 제목까지 붙여서 말이다.
잘 웃지 못한다고 겸연쩍어하던 사내가 와인 향기 앞에서 빙그레 웃는다. 도대체 와인이 뭔 짓을 한 걸까?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불문학자답게 번역에서 프랑스어의 표현과 의미를 살리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일본식 발음으로 불리던 와인 용어도 원어에 가까운 우리말로 모두 고쳐 실었다. ‘떼루와’, ‘테루아’를 ‘테르와르(Terroir·토양)’로 고쳤고 ‘피노누아’ 대신 ‘피노 느와르(Pinot noir, 포도 품종의 일종)’로 적었다. 최 교수가 직접 마셔본 와인은 자신의 느낌과 표현을 덧붙이기도 했다.
최 교수는 원래 공학도였다.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뒤 ‘숫자가 싫고 언어가 재미있어서’ 서울대 불어불문학과에 편입했다. 와인에 빠진 것은 1982년, 프랑스 유학 시절부터였다. 위에 이상이 생겨 병원에 갔더니 프랑스 의사가 “와인을 한 잔씩 마시라”고 처방했단다. “한 병에 몇 천원짜리 와인으로 시작했죠. 취하는 기분도 맥주와 다르고 맛도 묘하게 변하고…. 와인에 반해 1년에 200병씩 마셨어요(웃음).” 와인 덕분인지 속병도 고쳤다.
100대 와인 중 최 교수가 직접 마셔본 것은 몇 개나 될까. 그는 절반에 가까운 40여 종을 마셨다고 한다. 책에 나온 와인은 수십만원대의 고급품이지만 그는 비싼 와인이 최고라고 생각지 않는다. “유학 시절 도빌 해안에 놀러 갔어요. 손을 꼭 잡은 연인이 싸구려 테이블 와인을 마시며 석양을 바라보더라고요. 사랑하는 사람과 마시는 것이 최고의 와인 아니겠어요.”
이야기에 취했는지 사람에 취했는지 최 교수는 즉석에서 메뉴판에 없는 와인을 꺼냈다. ‘3 드 발랑드로(3 de valandraud)’. 고급 와인 ‘샤토 발랑드로’의 세컨드 라벨(같은 밭에서 나왔으나 주력 와인보다 품질이 떨어지는 제품)이란다. 와인 잔을 돌리니 꽃 향기가 방 안 가득 퍼진다. ‘잊을 수 없는 봄밤’은 깊어갔다.
글=홍주연 기자
살짝 엿본 '100대 와인' 몇 개
①산지 ②종류 ③포도품종 ④특징 ⑤국내 가격(빈티지)
1 솔라이아, 안티노리(Solaia)
①이탈리아 토스카나 ②레드 ③카베르네 소비뇽·카베르네 프랑 ⑤‘따스한 햇빛’이라는 뜻. 강렬한 과실 향과 복합적인 풍미를 가지고 있고 환상적인 구조와 균형미를 뽐낸다. 50만원(2004년)
2 샤토 무사르, 가스통 오샤르(Chateau Musar)
①레바논 베카아 밸리 ②레드 ③카베르네 소비뇽·시라 ⑤첫 모금의 따사로운 느낌은 곧 벨벳 같은 부드러움과 함께 신선한 과일 맛으로 이어진다. 향신료를 상기시키는 진한 향과 맛의 풍요로움은 이 와인이 오래 숙성되었음을 알려준다. 11만원 선(1998년)
3 샤토 드 피바르농(Chateau de Pibarnon)
①프랑스 방돌 ②레드 ③무르베드르 ⑤테르와르에 미량의 원소가 풍부한 이회암과 석회암 층이 있어 와인의 향과 섬세한 타닌이 살아 있다. 피바르농은 송로버섯·관목·향신료와 소나무 향을 발산하며 입 안에서 농밀도와 기품을 발산한다. 10만원대 초반(2002년)
4 포마르, 클로 데 제프노(Pommard, Clos des Epeneaux)
①프랑스 부르고뉴-포마르 ②레드 ③피노 느와르 ⑤포마르는 농밀하고 풍요하며 강건한 와인이다. 사람들은 포마르를 겨울 와인이라 부른다. 육즙이 많은 붉은 고기나 소스를 곁들인 토끼 고기와 마실 때 진가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20만원대 후반(2001년)
5 크리스탈, 루이 레드레르(Cristal)
①프랑스 샹파뉴 ②샴페인 ③피노 느와르·샤르도네 ⑤크리스탈 같은 뛰어난 품질의 샴페인은 강인함과 섬세함, 과실향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충족시킨다. 특히 이 와인은 우아함과 섬세함이 뛰어나다. 음식을 곁들이기보다 술만 따로 마시는 것이 좋다. 40만~50만원
6 샤르도네 아트 시리즈, 리윈 에스테이트(Chardonnay Leeuwin Estate)
①호주 마거릿 리버 ②화이트 ③샤르도네 ⑤이 와인은 황홀한 과일 맛을 가지고 있으며 완벽한 균형미를 자랑한다. 경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기막힌 부케와 강인함을 보여주며 섬세함을 온전히 간직하면서 곱게 숙성된다. 10만원대 초반(2004년)
7 샹베르탱 도멘 트라페 페르 에 피스(Chambertin, Domaine Trapet Pere & Fils)
①프랑스 부르고뉴-샹베르탱 ②레드 ③피노 느와르 ⑤한 모금 입에 담으면 혀는 황홀한 액체의 부드러운 애무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파르르 떨며 입 안의 모든 감각세포들은 맛을 제대로 음미하려는 듯 돌연 사색에 잠긴다. 샹베르탱의 향은 너무 뛰어나서 부케라는 용어가 의미를 잃을 정도다. 40만원대 중반(200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