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연인과 마시는 와인이 최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3면

 3일 저녁 숭실대 불문과 최재호 교수(사진)의 서울 방배동 집에 들어서니 고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스위스 요리 라클레트예요. 화이트·레드 와인과 다 어울리는 맛이죠.” 식탁 한가운데 치즈·빵·버섯·양파·고기 등이 수북이 쌓여 있다. 작은 팬에 치즈를 넣고 지글지글 끓을 때까지 녹인 뒤 빵이나 구운 야채와 함께 먹는 것이다. 최 교수가 손수 메뉴판까지 준비했다. 고급 양장지에 ‘오늘의 요리’‘와인 리스트’‘디저트’ 등을 한국어와 프랑스어로 적어 넣었다. ‘최재호 집에서 잊을 수 없는 ^^ 봄 밤’이라고 깜찍한 제목까지 붙여서 말이다.

잘 웃지 못한다고 겸연쩍어하던 사내가 와인 향기 앞에서 빙그레 웃는다. 도대체 와인이 뭔 짓을 한 걸까?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와인 잔을 부딪치고 바게트 빵에 치즈를 찍어서 먹다 보니 집에 온 목적을 잊을 뻔했다. 최 교수는 이달 초 ‘전설의 100대 와인(알단테북스·2만5000원)’을 번역해 내놓았다. 프랑스 레스토랑 ‘타이방(Taillevent)’의 소믈리에들이 추천한 와인 100개를 샅샅이 해부한 책이다. “만화 ‘신의 물방울’처럼 초보자를 위한 책은 많은데 중급 이상의 애호가들이 볼 만한 책이 없더라고요. 한국의 와인 문화에 일본 영향이 지나치게 큰 것도 문제라고 생각했죠.”

불문학자답게 번역에서 프랑스어의 표현과 의미를 살리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일본식 발음으로 불리던 와인 용어도 원어에 가까운 우리말로 모두 고쳐 실었다. ‘떼루와’, ‘테루아’를 ‘테르와르(Terroir·토양)’로 고쳤고 ‘피노누아’ 대신 ‘피노 느와르(Pinot noir, 포도 품종의 일종)’로 적었다. 최 교수가 직접 마셔본 와인은 자신의 느낌과 표현을 덧붙이기도 했다.

이야기가 무르익자 최 교수는 레바논 와인 ‘샤토 무사르(Chateau Musar)’를 들고 나왔다. “이 와인을 마셔보세요. 아랍의 무희가 춤추는 것처럼 향이 아찔하죠.” 그래서 책에 ‘밸리 댄서처럼 유혹한다’는 표현을 넣었단다. 와인 잔을 손에 드니 코냑같이 강렬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 와인이 입 안을 감돌면서 베일에 둘러싸인 여인처럼 맛이 묘하게 변해갔다. 프랑스·미국 와인과 달리 석회질 맛도 느껴졌다.

최 교수는 원래 공학도였다.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뒤 ‘숫자가 싫고 언어가 재미있어서’ 서울대 불어불문학과에 편입했다. 와인에 빠진 것은 1982년, 프랑스 유학 시절부터였다. 위에 이상이 생겨 병원에 갔더니 프랑스 의사가 “와인을 한 잔씩 마시라”고 처방했단다. “한 병에 몇 천원짜리 와인으로 시작했죠. 취하는 기분도 맥주와 다르고 맛도 묘하게 변하고…. 와인에 반해 1년에 200병씩 마셨어요(웃음).” 와인 덕분인지 속병도 고쳤다.

100대 와인 중 최 교수가 직접 마셔본 것은 몇 개나 될까. 그는 절반에 가까운 40여 종을 마셨다고 한다. 책에 나온 와인은 수십만원대의 고급품이지만 그는 비싼 와인이 최고라고 생각지 않는다. “유학 시절 도빌 해안에 놀러 갔어요. 손을 꼭 잡은 연인이 싸구려 테이블 와인을 마시며 석양을 바라보더라고요. 사랑하는 사람과 마시는 것이 최고의 와인 아니겠어요.”

이야기에 취했는지 사람에 취했는지 최 교수는 즉석에서 메뉴판에 없는 와인을 꺼냈다. ‘3 드 발랑드로(3 de valandraud)’. 고급 와인 ‘샤토 발랑드로’의 세컨드 라벨(같은 밭에서 나왔으나 주력 와인보다 품질이 떨어지는 제품)이란다. 와인 잔을 돌리니 꽃 향기가 방 안 가득 퍼진다. ‘잊을 수 없는 봄밤’은 깊어갔다.

글=홍주연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살짝 엿본 '100대 와인' 몇 개

①산지 ②종류 ③포도품종 ④특징 ⑤국내 가격(빈티지)

1 솔라이아, 안티노리(Solaia)

①이탈리아 토스카나 ②레드 ③카베르네 소비뇽·카베르네 프랑 ⑤‘따스한 햇빛’이라는 뜻. 강렬한 과실 향과 복합적인 풍미를 가지고 있고 환상적인 구조와 균형미를 뽐낸다. 50만원(2004년)

2 샤토 무사르, 가스통 오샤르(Chateau Musar)

①레바논 베카아 밸리 ②레드 ③카베르네 소비뇽·시라 ⑤첫 모금의 따사로운 느낌은 곧 벨벳 같은 부드러움과 함께 신선한 과일 맛으로 이어진다. 향신료를 상기시키는 진한 향과 맛의 풍요로움은 이 와인이 오래 숙성되었음을 알려준다. 11만원 선(1998년)

3 샤토 드 피바르농(Chateau de Pibarnon)

①프랑스 방돌 ②레드 ③무르베드르 ⑤테르와르에 미량의 원소가 풍부한 이회암과 석회암 층이 있어 와인의 향과 섬세한 타닌이 살아 있다. 피바르농은 송로버섯·관목·향신료와 소나무 향을 발산하며 입 안에서 농밀도와 기품을 발산한다. 10만원대 초반(2002년)

4 포마르, 클로 데 제프노(Pommard, Clos des Epeneaux)

①프랑스 부르고뉴-포마르 ②레드 ③피노 느와르 ⑤포마르는 농밀하고 풍요하며 강건한 와인이다. 사람들은 포마르를 겨울 와인이라 부른다. 육즙이 많은 붉은 고기나 소스를 곁들인 토끼 고기와 마실 때 진가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20만원대 후반(2001년)

5 크리스탈, 루이 레드레르(Cristal)

①프랑스 샹파뉴 ②샴페인 ③피노 느와르·샤르도네 ⑤크리스탈 같은 뛰어난 품질의 샴페인은 강인함과 섬세함, 과실향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충족시킨다. 특히 이 와인은 우아함과 섬세함이 뛰어나다. 음식을 곁들이기보다 술만 따로 마시는 것이 좋다. 40만~50만원

6 샤르도네 아트 시리즈, 리윈 에스테이트(Chardonnay Leeuwin Estate)

①호주 마거릿 리버 ②화이트 ③샤르도네 ⑤이 와인은 황홀한 과일 맛을 가지고 있으며 완벽한 균형미를 자랑한다. 경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기막힌 부케와 강인함을 보여주며 섬세함을 온전히 간직하면서 곱게 숙성된다. 10만원대 초반(2004년)

7 샹베르탱 도멘 트라페 페르 에 피스(Chambertin, Domaine Trapet Pere & Fils)

①프랑스 부르고뉴-샹베르탱 ②레드 ③피노 느와르 ⑤한 모금 입에 담으면 혀는 황홀한 액체의 부드러운 애무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파르르 떨며 입 안의 모든 감각세포들은 맛을 제대로 음미하려는 듯 돌연 사색에 잠긴다. 샹베르탱의 향은 너무 뛰어나서 부케라는 용어가 의미를 잃을 정도다. 40만원대 중반(2004년)

▶ 중앙일보 라이프스타일 섹션 '레인보우' 홈 가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