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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명품 패션이 미술과 손 잡으면 … "핸드백, 난 어제 미술관 가서 샀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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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미술과 손을 잡는 명품 브랜드들이 늘고 있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에르메스 매장의 올봄·올여름 쇼윈도 디스플레이. 에르메스 미술상 후보 작가 배영환씨가 디자인했다. [에르메스 제공]

무라카미는 미술관 전시실 한 곳을 루이뷔통 매장으로 만들어 그가 디자인한 제품을 판매했다. [루이뷔통 제공]

 “패션과 사치품은 허영의 세금이다.”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는 지난해 여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모바일 아트’ 프로젝트를 처음 공개하면서 이렇게 운을 뗐다. 그는 “18세기 말에 나온 최초의 패션잡지 기사의 첫 구절”이라며 “오늘날 우리는 그 세금을 예술가와 건축가들에게서 환급받는다”고 말했다. ‘모바일 아트’전을 열어 브랜드 이미지를 높인다는 뻔한 얘기를 세련된 방식으로 풀어낸 셈이다.

최근 명품 패션과 미술의 ‘결혼’이 두드러지고 있다. 패션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미술작품의 희소성과 역사성을 닮고, 미술은 패션의 도움을 받아 대중성을 획득한다. 일종의 ‘윈-윈’ 전략이다.

지난해 10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MOCA)에선 미술과 패션이 가장 적극적으로 만난 전시가 열렸다. 루이뷔통 가방 디자인으로도 이름난 일본의 팝 아티스트 무라카미 다카시의 대규모 회고전이다. 가장 특이한 것은 전시실 한 곳을 털어 만든 한정판 루이뷔통 매장이었다. 미술관이 아예 명품 가방 매장으로 둔갑했다. 작품과 상품의 뒤섞임에 대한 거리낌이 없었다.

무라카미는 “내 주변 미술시장이 대중을 위한 패션 제품과 순수 미술작품을 모두 수용할 거라 믿는다”고 장담했다. 그래서인가, 로스앤젤레스에서 지난달 막을 내린 이 전시는 내년까지 뉴욕·프랑크푸르트·빌바오 등에서 계속된다.

루이뷔통은 극단적 사례다. 작가에게 제품 디자인을 맡기고, 미술관에서 그 제품을 판매한다.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요즘 명품 브랜드들은 미술과 손을 잡는 데 열성이다. 예컨대 에르메스 코리아는 2000년부터 에르메스 미술상을 지정해 매년 국내 신진작가를 선정해 오고 있다. 이곳 쇼윈도 또한 작가들이 직접 디자인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올봄·올여름 쇼윈도는 에르메스 미술상 후보작가 배영환씨가 꾸몄다.

카르티에도 1994년 파리에 세계적 건축가 장 누벨이 설계한 카르티에 재단 미술관을 건립한 뒤 독창적 전시를 선보이고 있다. 패션 디자이너 장 폴 고티에, 팝 아티스트 무라카미 다카시에 이어 지난해엔 한국 작가 이불이 개인전을 열었다. 카르티에 재단은 올 4월 덕수궁 석조전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에서 카르티에 보석전을 연다. 일본 도쿄 우에노 국립박물관, 러시아 크렘린궁에 이은 순회전이다. 미술계에선 ‘국립미술관에서 명품 보석전을 한다’는 볼멘 소리도 나온다.

지난해 말부터 미국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무라카미 다카시 회고전. [루이뷔통 제공]

◇앤디 워홀의 후예들=미술과 패션의 만남은 사실 새삼스럽지 않다. 예술가가 곧 장인이기도 했던 르네상스 시대엔 거장 자코포 벨리니가 원단을 디자인하는 등 미술이 패션과 자연스럽게 결합했다. 여성용 바지인 퀼로트를 창시한 20세기 초 디자이너 폴 프아레는 야수파의 원색, 입체파의 직선 등 당대 미술을 적극 받아들였다.

미술을 본격적으로 상업화한 작가는 앤디 워홀이다. 작업실을 아예 ‘팩토리’(공장)라고 이름 붙이고 메릴린 먼로·마오쩌둥(毛澤東) 등 유명인의 초상을 ‘찍어냈다’. 달러 마크를 실크 스크린으로 찍어 팔기까지 한 그는 미술의 경계를 허문 대표주자다.

서울대미술관 정형민 관장은 “앤디 워홀은 누구나 알고 있는 저가의 상품으로 작품을 만들었지만 오늘날의 작가들은 명품을 주제로 작업하며, 명품들은 미술관에 전시돼 예술이 되고자 한다”고 말했다. 그는 “20세기에 기업이 미술의 후원자에 머물렀다면, 21세기의 기업은 미술의 적극적 투자자”라고 설명했다.

권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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