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묵 교수 인터뷰 “나를 살린 건 줄기세포 아닌 IT 장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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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로 목 아랫부분이 마비된 이상묵 교수가 자신의 연구실에서 어떻게 강의 준비와 연구 활동을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이 교수가 이마에 ‘스티커 센서’를 붙이고 고개를 움직이면 노트북 스크린 위에 달린 카메라가 이를 인식해 화면의 커서가 따라 이동한다. 입김으로 작동되는 마우스와 영어 음성을 문자로 바꿔 주는 음성인식 프로그램 등의 장비도 갖춰져 있다. 책상 위에는 컴퓨터 화면에서 통화 버튼 등을 눌러 사용할 수 있는 전용 전화기(오른쪽 아래)도 놓여 있다. [사진=김상선 기자]

 서울대는 2월 28일 장학금 수여식을 했다. 발전기금에 출연한 장학금을 모아 학생에게 전달하는 행사였다. 기금 목록에는 ‘이혜정 장학금’이 있었다. 이상묵(46)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가 출연한 것이다. 2006년 7월 미국 지질조사 때 이 교수가 몰던 차가 전복되면서, 함께 타고 있던 그의 제자 이혜정(당시 24세)씨가 숨졌다. 이 교수는 목 아래가 완전 마비됐다. 숨진 제자 생각에 견디기 힘든 죄책감에도 시달렸다. 그해 11월 이건우 기계항공공학부 교수는 이상묵 교수에게 1억원을 기부했다. 이 교수는 이 돈으로 ‘이혜정 장학금’을 만들었다. 이혜정 학생의 쌍둥이 언니가 “동생이 사고 나기 전, 이 교수님의 ‘바다의 탐구’ 수업을 듣고 인생의 진로를 해양지질학 쪽으로 결정했다는 말을 버릇처럼 했다”고 전했다고 한다. 장학금 수여식을 계기로 기자는 지난달 28일 이 교수의 연구실을 찾았다. 그와의 대화 곳곳에서 핼렌 켈러의 ‘장애는 불편이지만 불행은 아니다’는 말뜻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곤 3월 4일까지 세 차례 더 이 교수의 연구실을 찾았다. 그는 어떻게 강단에 다시 서게 됐는지를 담담하게 전해줬다. 대학신문(서울대 학보)은 3일 이 교수 이야기를 비중 있게 보도하기도 했다. 다음은 이 교수와의 일문일답. (※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

-강단에 다시 서는 데 용기가 필요했을 것 같습니다.

“척추를 다쳤다고 수명이 줄어들지는 않습니다. 일반인과 비슷하게 살다 죽죠.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했습니다. 누워서 평생을 보낼 수는 없잖아요. 그렇다고 부족한 모습으로 돌아오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연구와 강의에 전혀 문제가 없다는 걸 증명해야 돌아갈 수 있는 곳이 ‘강단’이었죠.”

-어떻게 강단 복귀가 가능했나요.

“한국에서는 아직 낯선 개념이지만 미국에는 ‘작업치료사(occupation therapist)’가 일반화돼 있습니다. 물리치료사가 근육이나 뼈의 회복을 돕는다면, 작업치료사는 장애를 가진 자가 자기 직업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죠. 치료사가 전동휠체어를 골라줬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소프트웨어와 장비를 소개해줬어요. 본격적인 재활이 시작된 것입니다.”(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사고를 당한 이 교수는 LA 재활 전문병원에서 치료를 마무리했다.)

-어떤 장비가 강단에 복귀하는 데 도움을 줬나요.

“장애인을 돕는 장비와 소프트웨어는 수십 가지가 넘었습니다. 입김으로 부는 마우스뿐만 아닙니다. 혀만 움직일 수 있는 환자를 위해 틀니 모양의 센서도 만들어져 있죠. 그것조차 힘든 환자의 경우 뇌파를 잡아 컴퓨터를 조종할 수 있는 ‘헤드셋’도 있죠. 상상을 초월합니다. 컴퓨터만 자유롭게 다루기 시작하면 재활은 생각보다 쉽습니다. 머리를 쓰는 교수의 경우엔 더욱 그렇죠. 수업 준비와 집필에 시간이 더 들어가지만, 다른 활동을 덜 하니 시간이 모자라진 않아요. 나를 살린 건 줄기세포가 아니라 정보기술 (IT)인 셈이죠.”

-연구활동을 하면서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인가요.

“난 굉장히 역동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세계 5대양 중 안 가본 곳이 없습니다. 친구들이 교수가 아니라 뱃사람이라고 했을 정도였습니다. 지금은 현장 조사를 할 수 없게 됐죠. 그게 제일 아쉬워요. 하지만 연구는 팀플레이입니다. 내 연구실 석·박사 과정 학생이 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뒤 좌절감에 빠지지 않았나요.

“LA에 있는 재활 전문병원으로 이송된 뒤 정신과 전문의가 찾아왔습니다. 정상인이 심각한 장애를 만나면 생기는 ‘정신 손상’을 치료하기 위해서라고 했어요. 나와 한참 대화를 나누던 의사가 ‘당신을 다시 찾을 필요가 없겠다’며 웃으며 자리를 떴습니다.”

-무슨 말을 했는지 궁금합니다.

“죽을 수도 있었는데 살았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방식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말했죠(그는 1~2분 동안 하던 말을 멈췄다). 처음부터 그럴 수는 없었겠죠? 쓰라렸습니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라고 말하는 아내의 얼굴을 너무 슬퍼서 쳐다볼 수도 없었어요. ‘덤으로 산다’는 단순한 사고 전환이 상처를 치유하기 시작했죠. 내가 단순한 인간이거든요(웃음).”

-미국의 재활은 한국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라크전에 나선 미군 중에는 대인지뢰에 의해 다리를 잃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군 병원의 목적은 이들을 데려다 치료해 집으로 돌려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병원은 의족에 익숙하도록 환자를 훈련시킨 뒤 행정병 등으로 보직을 바꿔 정상적으로 군복무를 마치도록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재활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뷰 도중 그는 휠체어 스위치를 뺨으로 조정해 휠체어를 뒤로 젖혔다. 의자가 뒤로 넘어가듯 휠체어는 천천히 기울어져 이 교수를 ‘누운 자세’로 만들었다. 감각이 없는 그에게 가장 두려운 건 ‘욕창’이다. 체중이 한곳에 눌려 피부가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30분에 1분씩 자세를 바꿔줘야 한다. 그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화가 나는 건, LA재활병원에 한국 국회의원도 다녀갔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놀랍다’는 말을 연발했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아무것도 안 한다면 왜 왔다 갔는지 모르겠어요.”

-최근에 비슷한 처지의 프랑스인과 e-메일을 주고받는다고 들었습니다.

“마리 프랑스 브루(67) 여사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습니다. 그는 얼굴조차 움직일 수 없어요. 호흡도 자력으로 할 수 없죠. 밥도 못 먹고요. 단지 얼굴 근육의 일부분만 움직입니다. 바로 그 부분에 스위치를 달아 컴퓨터를 다루죠. 저와 1주일에 한 번씩 연락을 주고받습니다. 놀라운 사람이죠.”

-어떤 내용의 e-메일을 주고받았나요.

“내가 ‘당신을 보며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나는 말도 하고, 밥도 먹고, 호흡도 하지 않느냐. 당신이 용기를 줬다’고 보냈죠. 그랬더니 브루 부인이 ‘무슨 말이냐. 내가 더 행운아다. 나는 당신 나이에 날아다녔다’라는 재치 있는 답장을 보내서 한참 웃었습니다.”(※브루 여사는 15년 전인 52세 때부터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 이 교수는 44세에 사고를 당했다.)

-소망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리브는 ‘크리스토퍼 리브 재단’을 만들어 수많은 척추 질환자들에게 혜택을 줬어요. 리브처럼 큰돈을 기부할 수 없겠지만, 나도 장애인들이 세상과 만날 수 있는 IT를 알리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큰돈 드는 일 아닙니다. 중요한 건 홍보예요. 알면 얼마든지 장비와 소프트웨어를 구할 수 있습니다. 휠체어를 빼면 내 장비와 소프트웨어는 300만원을 넘지 않아요. 한국정보문화진흥원(kado.or.kr)이 이런 일들을 합니다. 문제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지요.”

글=강인식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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