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Story] 10년 전 한국 기업이 만든 세계 첫 MP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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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10년 전인 1998년 3월 독일 하노버에서 열린 세계 최대 정보통신박람회 ‘세빗(CeBIT)’ 현장. 한국의 이름 없는 한 기업이 마련한 부스에 관람객이 모여들었다. 새한정보시스템이 개발한 세계 최초의 MP3 플레이어(MP3P) ‘엠피맨F10’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반응은 뜨거웠다. “한마디로 ‘신기하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였어요. 그때만 해도 음악이란 CD나 카세트 테이프에 저장해 듣는 거지, 디지털 파일을 ‘재생’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거든요.” 당시 새한정보시스템의 마케팅팀장이었던 김경태 제이엠이디지탈 대표의 말이다.

그러나 그뿐. 정보통신(IT) 전문가들은 엠피맨F10을 그저 ‘재미있는 아이디어 상품’ 정도로 폄하했다. 혁신적이긴 하지만 시장성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김 대표는 “그들의 생각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했다. 10년 뒤인 현재, MP3P는 그 혁신성으로 세계 IT산업의 향배를 바꾸는 거대 조류가 됐다. 반면 개발자는 새 상품 시장 개척에 고군분투했으나 2003년 끝내 부도가 났다. 원천 기술도 우여곡절 끝에 미국 기업에 넘어갔다. 이제는 삼성전자 등 국내 MP3P 제조사들이 되레 로열티를 물 걱정을 하고 있는 처지다.

◇날아가 버린 특허권=98년 당시 새한정보시스템은 새한그룹의 계열사였다. 그러나 외환위기로 휘청대던 새한그룹은 ‘벌어오는 것 없이 연구개발비만 자꾸 달라는’ 이 계열사를 미운 오리새끼 보듯 했다. 결국 그룹 측은 2000년 새한의 MP3P 부문만을 떼어내 분사시켜 버렸다. 함께 나온 직원들은 ‘엠피맨닷컴’이란 벤처기업을 만들어 새 출발을 다짐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가장 큰 어려움은 97년 출원한 MP3P 설계 특허권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 엠피맨닷컴(구 새한정보시스템)이 보유한 ‘MPEG 방식을 이용한 휴대용 음향재생장치 및 방법’ 기술은 MP3P 제작을 위해 꼭 필요한 원천기술이다. 그런데도 4년이 지나도록 특허권이 나오지 않았다. MP3P 업계 관계자는 “뒤늦게 비슷한 제품 개발에 뛰어든 벤처기업들이 ‘특허권이 너무 포괄적’이라며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실제 이 회사가 특허권을 획득한 2001년에는 이미 MP3P 관련 국내 벤처기업이 100여 개에 이를 정도였다. 회사 경영에도 문제가 있었다. 기술 개발에만 매달리느라 시장이 원하는 제품을 기획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반면 경쟁사인 레인콤은 MP3 기술로 녹음한 CD를 재생하는 신개념 CD플레이어를 선보여 시장을 선점했다. 이어 2002년에는 삼각뿔 모양의 파격적 디자인을 내세운 ‘프리즘 IFP100’으로 MP3P 대표 업체의 위상을 공고히 했다. 2003년 7월 엠피맨닷컴은 부도가 났고, 다음해 11월 레인콤에 흡수됐다. 김 대표는 “특허 관리가 제대로 됐다면 엠피맨닷컴은 (CDMA 원천 기술을 가진) 미국의 통신회사인 퀄컴에 버금가는 회사가 됐을 것”이라며 “그때만 해도 정부나 업계가 기술 보호니 세계 표준이니 하는 데 너무 어두웠던 게 천추의 한”이라고 말했다.

◇되레 로열티 물어야 할판=시장을 개척한 엠피맨닷컴은 무너졌지만 한국 MP3P 업계는 이 회사가 개발한 기술을 바탕으로 도약을 거듭했다. 새 기술과 서비스 개발에도 한 발 앞서갔다. 2005년 1월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회장은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소비자가전전시회(CES) 기조연설 중 레인콤의 MP3P를 치켜들며 “이것이 디지털 라이프의 미래”라고 외치기도 했다.

그러나 2005년 미국의 애플사가 ‘아이팟 나노’를 내놓으면서 전세가 역전됐다. 아이팟 나노는 ‘청바지 주머니에 쏙 들어갈 만큼’ 얇으면서도 컬러 화면이 나왔고 조작도 간편했다. 애플은 유수의 음원 회사들과 독점적 제휴를 해 미국 시장을 빠르게 잠식했다<표 참조>. 경영 위기에 빠진 레인콤은 2006년 결국 엠피맨닷컴의 특허권을 미국의 MP3P 칩셋 제작업체인 시그마텔에 매각했다. 10여 개의 국내 중소기업은 로열티를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삼성전자·LG전자 등 대형 업체들은 언제고 특허권 침해 소지에 노출돼 있는 셈이다.

이나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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