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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코리안인데 너무 달라” 서울 공연 뒤 눈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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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8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펼쳐진 뉴욕 필하모닉의 공연 도중 미셸 김(앞줄 왼쪽에서 둘째)이 동료들과 함께 청중의 환호에 답례하고 있다. [중앙포토]

만난 사람 = 강찬호 특파원

 “공연 피날레로 ‘아리랑’을 연주하는 순간 저를 비롯해 105명 단원 전부가 눈물을 흘렸습니다. 북한 청중들 대단해요. 1500명이 넘는 사람이 10분 넘게 쉬지 않고 손을 흔들며 앙코르를 외치는데, 그런 열광적인 반응은 세계 어느 공연에서도 볼 수 없었습니다. 우리 단원 모두 무대를 떠나지 못했어요. 마음 같아선 객석으로 뛰어 내려가 포옹해 주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특히 ‘아리랑’ 전주가 시작되자 객석에서 ‘아리랑이디. 아리랑!’이라며 소곤대는 소리가 들렸고, 연주가 이어지자 어깨를 흔들며 따라 부르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그러나 북한 국가를 연주할 땐 담담했어요. 기분이 묘했지요.”

지난달 26일 미국 교향악단으로는 처음 평양에서 역사적 공연을 한 뉴욕 필하모닉의 미셸 김(35·여·한국명 김미경·사진) 부악장.

그는 3일 미국 뉴저지주 자택에서 본지와 한 인터뷰에서 “생애 최고의 연주를 했다”며 “북한 동포들이 원한다면 언제든 다시 가서 공연할 것”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북한과 인연이 깊다. 6·25 직전 조부모가 평북 선천에서 아버지를 데리고 남하한 실향민의 후손으로, 외삼촌 가족들이 아직도 북한에 산다. 1984년 서울 명일초등학교 5학년 재학 중에 서울대 작곡과 출신인 아버지 김정길씨를 따라 미 로스앤젤레스로 이민을 갔다. 그리고 서던캘리포니아대 손턴음대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했다. 학생 시절 뛰어난 실력으로 미 전역 100여 개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91년 고3 때는 ‘대통령 장학생’으로 선발돼 백악관에서 아버지 부시 대통령과 악수를 했고, 부시 부처가 참석한 가운데 케네디센터에서 연주했다. 2001년 뉴욕 필에 입단했고, 현재는 지휘자를 돕는 부악장(Assistant Concertmaster)이다. 보험회사에 근무하는 한국계 남편과 1남1녀를 두고 있으며, 우리 말을 유창하게 구사했다.

-역사적인 이번 공연을 어떻게 준비했나.

“지난해 여름 TV 뉴스를 통해 우리가 북한에서 공연할 것이란 얘기를 처음 접했다. 공연이 확정되자 단원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평양에 가겠다고 나설 정도로 열의가 대단했다. 매주 4일간 하루 2시간30분씩 호흡을 맞췄다. 덕분에 공연 당일에는 리듬과 선율이 어느 때보다 훨씬 더 잘 맞았다. 정말이지 마음에서 우러나는 연주를 했다. 우리는 공연에 앞서 TV와 라디오로 전국에 생방송해 달라고 북한 측에 요구했다. 가급적이면 많은 주민이 들을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였다. 과거 뉴욕 필이 소련에서 공연했을 때는 야외에서 해 많은 사람이 들을 수 있었지만 이번엔 실내공연이었기 때문이다. 북한은 이 요구를 즉각 수락했다. 지휘자 로린 마젤도 무척 열정적이었다. 당초 그는 ‘청중 여러분. 이처럼 뉴욕 필 공연에 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번에 저희가 연주할 곡은 바그너의 로엔그린입니다’와 같은 문장을 몽땅 한국어로 하겠다고 나섰다. 나에게 한국어 개인교습까지 받았지만 너무 어렵고 긴 문장이라 결국은 포기했다.”

-북한의 대우는 어땠나.

“그런 환대는 처음 받아 봤다. 우리를 데려간 모든 곳이 웅장했고, 천장은 끝없이 높았으며 시설도 으리으리했다. 식사도 최고급이었다. 칠면조 고기·죽·송아지 스테이크 등 모두 아홉 가지 코스가 나왔다. 디저트로 내가 좋아하는 술떡이 나오는가 하면 한 테이블에는 난생 처음 보는 술 열한 가지가 가득 놓여 있었다. 북한 술을 총집합한 것이라고 했다. 호기심이 많아 전부 마셔 봤다. 북한 측이 ‘최고의 대우를 해 드리겠다’고 말했는데 사실이었다. 평양에 내리자 그들은 휴대전화를 수거해 갔지만 카메라·캠코더·노트북 등은 무사통과였고 얼마든지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 덕분에 단원들 모두 진기한 평양 풍경을 찍느라고 난리였다. 나도 200장 넘게 사진을 찍었다. 유일한 해프닝은 미국인 단원 몇몇이 아침 조깅을 나갔다가 10분 만에 북측 경비병들의 제지를 받고 호텔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들도 북한을 맘대로 돌아다닐 수 없음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는 전혀 되지 않았다.”

-미국 단원들의 반응은.

“다들 ‘북한을 다시 보게 됐다. 최고의 대접을 받고 돌아간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평양을 떠난 다음 날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아리랑’을 연주하는 순간 그들은 왈칵 눈물을 쏟았다. 똑같은 코리안인데 생활 수준 격차가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는 것이었다.”

-북한을 보니 정말 그렇게 큰 격차가 느껴졌나.

“너무 안타까웠다. 상점들은 다 문을 닫거나 폐쇄됐고, 밤에 호텔의 30층 객실에서 밖을 보니 칠흑 같더라. 한국보다 20년은 뒤떨어진 것 같았다. 북한 사람들에게 ‘같은 민족끼리 갈라져 힘들게 살아야 하는 현실이 너무 창피하다’고 몇 번이나 얘기했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생수 병을 보니 97년이라 적혀 있었다. 그래서 10년 전 물을 마셔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북한 사람들이 올해가 주체 97년(김일성 출생 기준)이라며 ‘새 물이니 맘 놓고 마시라’고 해 웃음을 터뜨렸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나오지 않았는데.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평양에 간 건 북한 동포들에게 자유의 선율을 들려주기 위해서였지 김 위원장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다들 처음부터 신경을 안 썼다.”

-북한 사람들을 보니 동질감이 느껴졌나.

“평양에 내리자마자 북한 무용단의 환영 공연을 보았는데, 바로 한핏줄임이 느껴졌다. 한복·도라지민요·어깨춤 등등에서 ‘남북한’은 없고 그냥 ‘코리아’가 있을 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쩌면 그렇게 하나같이 표정이 똑같고 행동이 기계 같은지 놀랐다. 말끝마다 ‘위대한 지도자 동지’를 반복하는 것도 듣기 거북했다. 그들은 자유가 없는 삶을 살면서도 자유를 누리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불행한 상황에서도 자신들의 나라와 지도자를 정말 사랑하고 있음을 느꼈다. 세뇌가 된 것이겠지만.”

-기억나는 북한인들은.

“첫날 만찬에서 북한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지배인과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45세의 지휘자는 내게 ‘뉴욕 필 공연을 보게 돼 영광’이라며 ‘특히 지휘자 마젤 선생은 내가 독일에서 공부할 때 뵌 적이 있다’고 소개해 기억에 남는다. 그들도 나름대로 유학도 하고, 서구 음악에 깊은 지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또 나의 가이드를 맡았던 젊은이는 나보다 세 살 어린 운동선수 출신이었는데 잘 생겼고 영어도 잘했다. 그에게 ‘나라만 갈라지지 않았다면 누나·동생으로 만날 사이였는데 안타깝다. 그래도 당신을 동생으로 부르겠다’고 얘기했더니 그가 말없이 웃음만 짓던 게 기억난다.”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가 이번 공연 성사에 큰 힘을 기울였다는데.

“그는 지난해 12월 우리를 찾아와 방북 설명회를 했다. 그는 ‘미국은 북한의 비핵화를 위해 평양과 협상 중이고 이제는 그들이 핵 신고를 해야 할 때’라고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 이어 ‘북한에서 공연 한 번 한다고 핵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행사를 하면 우리가 문화적으로 북한에 비집고 들어갈 틈이 생긴다’며 ‘여러분은 미국의 문화 대사(ambassador to art)’라고 격려해 줬다.”

-북한 인권 문제를 걸고 일부 단원이 공연을 반대했다는 설이 있는데.

“과장된 얘기다. 일부 단원이 안전 문제로 방북을 기피했다는 얘기도 전혀 사실이 아니다. 나는 오히려 그들이 최고의 대우를 해줄 것으로 확신했다. 다만 우리가 평양에 간다면 어떤 목적, 어떤 자격으로 가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는 얘기는 있었다.”

-전에도 평양에 초청받은 적이 있었다고 들었다.

“고교생 때 플로리다 인터내셔널 콩쿠르에서 우승한 직후 북한과 연결된 재미동포로부터 제 소문을 들은 북한 측이 초청했다. 그들은 ‘조국이여 영원하라’는 북한 가곡을 연주 곡목으로 지정해 악보까지 보내 왔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북한에 간다는 건 두려운 일이라 실행하진 못했다.”

-음악가로서 꿈과 포부는.

“나는 한국인이면서 미국인이다. 미국의 문화(음악)를 북한 동포들에게 나눠줄 때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앞으로 더욱 실력 있는 연주가로 성장하고, 서울에 자주 가서 아이들 가르치고 멋진 공연을 선사하고 싶다. 해외 공연은 물론 연주 활동이 많아 아이들에게 소홀했다. 앞으로 아들 윤제(4)와 딸 다연(2)에게 정성을 다하는 엄마가 되고 싶다.”

강찬호 에머슨(뉴저지주)


목사 친척 총살당해 … 아버지 가족 월남
미셸 김 비극의 실향사

 미셸 김의 평양 공연은 북한이 고향인 그녀 부모의 비극적인 실향사 때문에 더욱 극적이다. 다음은 미셸 김의 부모에게서 들은 이야기.

아버지 김정길씨는 1945년 평북 선천에서 숙부가 목사인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 때문에 그해에 들어선 북한 정권의 집중 감시 대상이 됐다. 김씨가 다섯 살 되던 50년 6월 26일, 북한이 남한을 침공한 다음날 인민군들이 김씨의 숙부 교회에 난입했다. 그러곤 문을 걸어잠근 뒤 기도를 드리러 온 숙부와 신도들을 총살했다고 한다. 비보를 접한 김씨의 부모는 더 이상 북한에서 살 수 없다고 판단해 집을 버리고 월남했다. 김씨는 당시 상황에 대해 “바로 내 옆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목격했고, 겹겹이 쌓인 시신들을 넘어 걸음을 재촉해야 했다”고 회고했다. 당시 한 살배기 아기였던 어머니 김경자씨도 신의주 집을 버리고 월남하는 부모 등에 업혀 사선을 넘었다.

서울의 교회에서 만난 두 사람은 결혼 후 딸 미셸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가 미셸을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로 키워냈다. 미셸이 촉망받는 차세대 음악인 대열에 들어선 87년, 북한은 김씨에게 미셸의 평양 공연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김씨는 딸이 북한에 억류돼 영영 돌아오지 못할까봐 걱정이 돼 그 요구를 일축했다. 하지만 20년 만인 지난해 다시금 날아든 딸의 평양 공연 초청장에는 김씨가 기꺼이 찬성했다. “이제는 남과 북이 마음의 문을 열 때고, 북한 동포들이 딸의 음악을 통해 조금이라도 자유의 공기를 맡아 볼 기회를 줄 때”란 생각에서였다. 

강찬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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