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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의 역사] 17. 청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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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육민관을 세운 홍범희 선생.

이렇게 시작된 육민관과의 인연은 이후 많은 의미를 갖게 됐다.

홍범희 선생은 농촌 사람들의 우상이 되었다. 논 팔고 소 팔아 자식만은 공부시키겠다는 당시 농민들에게 육민관의 탄생은 하늘이 내린 은총이었다. 洪선생은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총선에 출마해 제헌 국회의원이 됐다.

그는 이범석(李範奭) 장군의 족청(族靑)운동에 가담해 한국전쟁 당시 부산 피란정부에서 내무장관이 된 李장군 밑에서 차관을 지냈다. 그때 구평회를 비서관으로 기용했고 김영삼(金永三) 비서관과 한솥밥을 먹게 됐다.

나중에 이야기하게 되겠지만 부산 피란 때 나는 남포동이라는 데서 유엔군장교구락부(클럽) 지배인이 돼 댄서들과 고급스러운 한동안을 보내다 구락부 건물이 화재로 모두 타버리는 바람에 "당신이 무슨 댄스홀이요? 육민관이나 지켜주시오!"하는 洪차관의 호통에 다시 원주로 돌아온 내력이 있었다. 그때 洪차관이 아직 교장으로 돼 있어 나는 교감으로 학교를 운영했다.

나는 우선 충주에 있던 윤남한(尹南漢)을 불렀다. 청주상업 동기동창, 일본 주오(中央)대 동창, 일제 학병 동기, 서울대 문리대 동창인 그. 그가 오면서 학교 분위기가 제법 클래식해졌다. 유호(柳浩)라는 분이 있었다. 나는 사제리 뒷산의 절간에서 묵었다. 밤낮으로 그칠 새 없는 제트기 폭음을 들으며 전쟁을 진심으로 증오했다. 한밤에 라디오를 틀면 일본 드라마를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의 평화로운 삶을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윤남한과 우선 창고 같은 교사를 화강석 교사로 만들어 보자는 꿈을 꾸었다. 洪교장한테 상의했더니 무슨 돈으로 짓느냐고 했다.

"시작만 하게 해주십시오. 우리가 어떻게든 지어볼테니까요."

"체신부에 가서 100만환을 꾸게 해주지요." 이것이 시작이었다. 나는 체신부에 가서 100만환을 꾸었다. 윤남한.이창수씨와 학교 지을 땅을 물색했다. 면장한테 이야기했더니 우리를 데리고 개울이 흐르는 언덕배기 땅으로 갔다. 구부정한 것이 꼭 제트기 같다.

"거저 드릴 것은 이 땅뿐입니다."

"됐습니다!" 고 나는 외쳤다. 그리고 시작한 것이 지금의 육민관이다.

학생들이 땅을 파고 돌을 날랐다. 기공식 때 우리의 감격!

현용구(玄龍龜)라는 청년이 날아들어왔다. 절간에 들어가 이야기를 들어보니 김일성대 학생이라는 게 아닌가. 나는 그를 포근히 안아주었다. 그는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뒷날 교장이 된 사람이다.

이준해(李俊海)라는 수학선생이 나타났다. 학교 꼴이 제법이다 싶을 때 자금을 만들려고 수복 직후의 서울을 찾았다. 화신 근처에서 천관우를 만나 한국일보로 끌려간 것이 운명의 전환점이 됐다. 지형 따라 제트기처럼 화강석 교사를 짓자는 꿈은 윤남한.이창수에게 맡겼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그 뒤 몇해 걸려 '제트기 교사'가 완공됐다. 나는 신문기자로서 두 눈을 번뜩이고 다니고 있었다. 일대 배반행위였다.

나중에 이야기할 것을 미리 해버렸다.

한운사 작가

*** 바로잡습니다

3월 8일자 27면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중 '김영삼(金永三) 비서관'은 '김영삼(金泳三) 비서관'의 오기이므로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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