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대책·특별법 쏟아져도 닮은꼴 사고 되풀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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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호 18면

1989년 3월 엑손 발데스호에서 쏟아진 기름으로 알래스카 청정해역이 검게 변했다. 미국은 이후 이중선체 구조의 유조선만 운행을 허가하는 등 법적 규제를 강화했다. 또 10년에 걸쳐 생태계 변화상황을 면밀히 체크해 대책 수립에 반영했다. 중앙포토

“대형 참사가 벌어진 후 관련 법규를 고치고 새로 만든다고 법석을 떨었지만 지켜지지 않는 게 문제다.” “예산과 인력 부족 문제로 상시 체크 시스템이 없다.” 취재 과정에서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한 방재 시스템의 문제다.

대형 참사 후 얼마나 달라졌나

1993년 3월 78명의 사망자를 낸 구포 열차 전복 사고는 열차 운행 전 시공사의 무리한 발파 작업으로 지반이 약화됐기 때문에 일어났다. 철도법 제76조에는 철도 경계선에서 약 30m 범위에서는 관련 행정기관의 승인을 받은 뒤 공사하도록 돼 있으나 이를 지키지 않은 것이다.

이후 정부는 “정기적인 안전진단은 물론이고 공사 때 철저히 사전 안전점검을 하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공언(空言)이었다. 97년 10월 인천 지하철 1호선 7공구 붕괴 등 지하철 공사장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특히 지난해 6월 서울 마포 가좌역에서 일어난 철도 지반 붕괴 사고는 구포 열차 참사와 흡사했다. 전력구 설치작업을 하던 시공사가 사고 하루 전 철도시설공단과 상의도 없이 발파 작업을 한 것이 원인이었다.

“법규가 만들어져도 이를 현장에서 점검하는 안전요원의 관리가 중요하다. 안전 관리 업무 자체를 한직으로 생각하고 전문 분야로 인정해 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들에게 충분한 권한도 주어지지 않는다. 이런 현실에서 형식적인 관리가 이루어질 뿐이다.” 문명훈 건설교통시민연대 사무처장의 충고다.

2003년 발생한 대구 지하철 참사 후에도 안전 대책은 나왔다. 지하철 내장재가 불연 소재로 바뀌고 국가재난관리 종합대책도 수립됐다. 하지만 여전히 형식적인 대책이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서울산업대 김시곤 철도경영정책학 교수는 “대구 지하철 참사 후 비상대응 계획이 만들어졌지만 세부 지침이 부족했고, 비상대응 시나리오(매뉴얼)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사고가 나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제시해주는 비상대응 절차서(SOP)에도 지하철·일반철도·고속철도별 특징이 반영되지 않았다.

성수대교·삼풍백화점 붕괴 후 정부와 건설업계에서는 반성의 목소리가 높았다. 정부는 다중 이용 건축물에 대한 설계·감리 강화 등을 골자로 한 ‘부실공사 방지 및 건축물 안전 확보대책’을 발표했다. 96년 2월에는 ‘건설산업 경쟁력 강화와 부실 방지대책’이 중앙안전대책위원회에서 확정되고 ‘시설물 안전관리에 관한 특별법’도 제정했다. 99년에는 ‘새천년 안전한 나라 만들기 종합대책’이란 것도 마련됐다.

그러나 이런 제도와 법규가 시스템으로 확립되는 것이 중요하다. 조원철 연세대 사회환경시스템공학과 교수는 “부실공사 방지와 사후 관리를 위한 법제화는 잘 돼 있다. 얼마만큼 이를 시스템화해 현장에 적용하는지가 중요한데, 아직 멀었다”고 말했다.

대응 매뉴얼을 마련해 놓고도 상황을 오판한 사례도 있다. 정부는 95년 씨프린스호 기름 유출 사건 후 수년간의 연구를 거쳐 2005년 ‘대규모 해양오염 위기 대응 실무 매뉴얼’을 내놓았다. 매뉴얼에는 조류 변화 등 서해안 지역의 특징과 방제 요령이 정교하게 정리돼 있다.

하지만 이번 태안 앞바다 기름 유출 사고 때 정부는 매뉴얼에서 지적한 조류 흐름에 따른 방제 시간을 치밀하게 고려하지 못했다. 씨프린스호 사건 당시 기름 유출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유조선은 반드시 이중선체로 하자”는 주장이 제기됐지만 정부는 지금까지도 이를 실행하지 않고 있다.

미국은 알래스카 기름유출 이후 방제능력 10배 강화
89년 3월 24일 새벽 미 알래스카 앞바다에서 엑손 발데스호가 암초에 부딪혀 선체에 구멍이 나 4만1000t의 기름이 유출됐다. 사고 후 미국은 90년 9월 유류오염법을 제정했다. 이 법에 따라 민간법인인 해양유출 방제회사가 설립됐다. 이중선체 구조의 유조선만 운행을 허가하는 등 법적 규제를 강화했다. 기름 제거 능력도 높였다.

3일 안에 5만t의 기름 제거가 가능한 장비를 확보해 해양방제 능력을 10배 이상 향상시켰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사고 후 10년 동안 현장을 철저하게 감시했다는 점이다. 미국 국립해양대기청은 10년간 알래스카 기름 유출 현장과 실험실에서의 연구를 통해 해안 복원의 추이와 생태계 치유 상황을 면밀히 체크해 지속적인 대책 마련에 반영했다.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 사고(94년)와 비슷한 사건이 70년 일본 오사카 지하철 공사장에서 발생했다. 도시가스용 관 매설 작업 도중 이음새 부분이 파열됐다. 새어 나간 가스에 불이 붙어 화재와 폭발로 번졌다. 79명이 희생되고 420명이 부상하는 대형 참사였다. 사고를 계기로 ‘굴착에 의해 주위가 노출된 가스관의 방호에 관한 법’이 제정됐고 지하공간 안전지침이 강화됐다. 이후 일본에서는 자연재해를 제외하고 지하 매설물을 잘못 건드려 발생하는 인재는 사라졌다.

2004년 1월 5일 대구지하철 방화 사건과 유사한 사건이 홍콩에서 발생했다. 열차가 홍콩섬과 주룽반도를 연결하는 해저터널을 지날 때 50대 방화범이 신문지에 불을 붙인 후 석유통(4.5L)과 일회용 버너 가스통 5개를 함께 지하철 내부로 던져 넣었다. 방화 수법으로만 보면 대구 지하철 때에 비해 훨씬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 사건으로 승객 1200명 중 단 14명이 경상을 입는 데 그쳤고, 화재는 8분 만에 진화됐다. 비상대응 시스템도 잘 갖춰져 있었지만 불연성 스테인리스 의자와 알루미늄 천장으로 만들어진 고급 전동차를 수년 전부터 운행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경원대 박형주(소방방재공학) 교수는 “홍콩 지하철의 경우 1년에 두 번씩 매뉴얼에 따라 공개훈련을 하고 있으며 비상 매뉴얼 시험에서 기관사의 성적이 나쁘면 2개월간 전동차 운행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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