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족들의 욕망에 불을 붙여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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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중국 기업의 성공 스토리는 드라마 그 이상이다. 격동하는 시대 흐름을 타면서 부의 기반을 일궜기 때문이다. 성공의 조건은 하나, 절대 남들처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기업이 부동산 전문 기업인 비구이위안(碧桂園)이다. 창업주 양궈창(楊國强·52)은 자신의 지분 전부(70%)를 딸 양후이옌(楊惠姸·25)에게 넘겨 그를 ‘중국 최고의 갑부’로 만든 인물이다.

▶중국 베이징의 고급 아파트 단지.

비구이위안은 탄생 배경이 엉뚱하게도 ‘거품’이다. 그 출발을 보자. 1993년 여름, 중국 국무원은 특단의 부동산 대책을 발표했다. 부동산이 지나치게 과열돼 국민 경제에 위협이 되고, 인민들의 박탈감을 키운다는 판단에서 나온 조치다. 부동산 거품이 지나치게 심했기 때문이다.

우선 부동산 개발 업자에 대한 돈줄을 조였다. 기존 대출도 신속하게 회수했다. 모기지론에 대한 이자도 올렸다. 기초 체력은 외면한 채 상승만을 기대하고 돈이 몰렸던 부동산 경기는 급속히 얼어붙었다. 전국 곳곳에 들어선 화위안(花園·별장의 별칭)들은 먼지만 뒤집어쓴 채 방치됐다.

광둥(廣東)성 순더(順德)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순더시 광저우(廣州) 고속도로 남면 20만 평 부지에 200여 채의 별장이 지친 듯 서 있었다. 그 주변 농지와 저수지, 구릉에는 나무 담장이 설치돼 있었다. 별장 단지로 개발될 예정이라는 표지다. 그러나 일대엔 적막만 흘렀다. 크레인 굉음은커녕 인부 그림자 하나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중국 최초의 ‘브랜드 아파트’

▶‘비구이위안’이 중국 최고의 브랜드라고 홍보하는 인터넷 홈페이지.

당시 양궈창은 건축업자였다. 양은 바로 이 순더시 광저우 지역 별장의 일부도 시공했었다. 부동산 개발 업자에게 시공비를 요구했다. 그러나 개발 업자는 웃으며 텅 빈 주머니만 내보였다. 시공비를 못 건지면 그 자신도 파산이다. 양은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떼를 써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저 창문 밖만 멀건하게 응시했다.

그때 업자가 한 마디 툭 던졌다. “집 팔아서 가져가!” 이 한 마디가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14년 뒤 중국 최고의 갑부를 탄생시킨 한 마디이기도 했다.

양궈창은 이를 악물었다. 거리에 나앉지 않으려면 집을 팔아야 했다. 그러나 부동산 한파가 기승을 부리는 계절에 어디 가서 부동산을 판단 말인가. 그는 집에 열흘 동안 틀어박혔다.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딸이 방 안으로 들어오면서 “아빠, 나도 귀족학교에 보내줘”라고 말했다. “돌연, 머릿속이 환해졌다.” 그는 훗날 중국 언론과의 회견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그는 즉각 딸과 함께 순더시 교외의 귀족학교로 달려갔다.

시내에서 자동차로 2시간쯤 걸리는 외진 곳이었다. 학교만 늪지대 위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그럼에도 광저우 지역의 부자들은 이 학교에 아이들을 보내지 못해 안달이었다. 학생 1인당 15만 위안(약 1800만원)의 입학금을 내야 하는데도 대기자 명단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이유는 하나. 서양식 선진 교육에다 귀족적 교육, 즉 승마·골프·스키·폴로를 가르친다는 것이었다. 부자들은 차별화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었다.

양궈창은 무릎을 쳤다. 그의 머릿속에는 학교와 별장을 아우르는 새로운 주택 컨셉트가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순더로 돌아온 즉시 유명한 문필가를 찾아가 작명을 의뢰했다. 이 문필가는 그에게 ‘비구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푸른 계수나무’같은 집을 지으라는 뜻이다.

중국 최초로 ‘브랜드 아파트’가 탄생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바로 이때 그의 사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한 인물이 등장했다. 중국 관영 신화(新華)통신 기자 왕즈강(王志綱)이다. 당초 양궈창은 그가 신화통신사 기자인 점을 이용해 아파트를 선전하는 글을 써달라고 부탁할 심산으로 그에게 접근했다. 그러나 보기 좋게 딱지를 맞았다. 대신 왕즈강은 그에게 천금과도 같은 충고를 던진다.

“비구이위안은 기사 한 편으로 기사회생할 수 있는, 그런 사업이 아니다. 현재의 상황으로 보면 부동산 개발 업자가 부동산을 하면 필패(必敗)다. 그들이 부동산에서 뛰쳐나와야 진짜 개발상이 될 수 있다. 부동산은 결코 철근, 콘크리트가 전부는 아니다. 부동산도 문화를 통해 펼쳐나가야 한다. 부동산을 완전히 새로운 생활방식으로 만들어야 한다.”

양궈창의 3대 마케팅 비법

▶ 부동산 브랜드를 개발하라
푸른 계수나무라는 뜻의 ‘비구이’를 주택업계 최초로 개발해 사용
▶ ‘숨어있는 가치’를 발견하라
버려진 화위안(별장)에 새 컨셉트를 가미하면 ‘보물’로 변한다고 파악
▶ 부자마케팅을 하라
‘아파트+학교+클럽하우스’로 연결된 상품을 부자들에게만 집중 판매

양궈창은 다시 한 번 무릎을 쳤다. 그는 즉시 왕즈강을 기획담당 책임자로 초빙했다.

94년 비구이위안은 광저우의 전 매체에 ‘자녀에게 투자하십시오!’라는 광고를 냈다. ‘21세기의 황포 경제군관학교-비구이위안’ 이란 자극적인 문구도 내세웠다. 비구이위안 아파트 단지 안에 세울 ‘비구이위안 귀족학교’의 출범을 알리는 내용이다.

이 광고는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왔다. 1차 모집에 무려 1300명이나 몰려들었다. 처음 18만 위안으로 책정했던 입학금도 30만 위안까지 올렸다. 이를 통해 비구이위안은 단숨에 3억9000만 위안의 거금을 끌어 모았다. 브랜드 아파트 이미지에 학교를 얹은 컨셉트로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비구이위안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 다음 프로젝트의 광고 카피는 ‘5성급 호텔을 드립니다’였다. 부자들의 고급 취향을 노린 전략이다. 이 광고는 또 한 번의 대박을 터뜨렸다. 이때부터 ‘아파트+학교+클럽하우스’가 연결되는 ‘비구이위안식 모델’이 탄생했다 ‘비구이위안 모델’은 짓기도 전에 매진됐다. 비구이위안은 선금을 받고 아파트를 짓기 시작했다.

“배추를 팔 듯이 아파트를 팔았다”고 양궈창은 회고했다. 95년부터 올해까지 비구이위안은 매년 하나씩 ‘비구이위안 단지’를 만들었다. 지금까지 광둥(廣東), 창사(長沙), 네이멍구(內蒙古)에 모두 22개의 비구이위안 단지를 조성했다. 현재 보유 중인 건축용 토지만도 8000만㎡가 넘는다. 홍콩(7800만㎡)보다 넓다. 비구이위안의 시장가치는 이미 2000억 위안(약 26조원)을 넘어섰다.

25세의 양후이옌은 누구

17조 재산 상속 받은 ‘비밀의 얼굴’

요즘 중국 재계의 가장 큰 화제 인물은 역시 ‘중국 최고의 부호’에 오른 양후이옌(楊惠姸·25)이다. 2007년에 아버지 양궈창(楊國强·52) 비구이위안(碧桂園) 회장이 자신의 보유 주식 전부를 넘겨준 덕분에 졸지에 중국 최대 부호가 됐다. 재산은 어림잡아 1300억 위안(약 17조원)이다.

전 세계적으로 봐도 독일 출신 여성 부호인 BMW 상속자 조한나 쿠안트(23) 다음가는 세계 2위의 여성 부자다. 조지 소로스, 스티브 잡스, 루퍼트 머독을 넘어서는 재산이다.

그의 꿈은 교사였다. 말수는 적지만 성격은 따뜻하다. 아버지가 세운 광둥 순더의 비구이위안 국제학교를 졸업한 뒤 2001년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마케팅과 물류를 전공했다. 하지만 주변 중국 유학생들은 그의 아버지가 중국 최대의 부동산 재벌인 것을 몰랐다.

그는 귀국 이듬해인 2006년 칭화(淸華)대 출신 유학생인 청년과 결혼했다. 지금은 아버지와 함께 회사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아버지는 왜 그렇게 일찍 전 재산을 딸에게 넘겨줬을까. 그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우린 가족이니까.”

양 회장에게는 딸만 셋이 있다. 큰딸은 어렸을 때 열병을 알아 지력이 정상이 아니다. 후이옌이 둘째고, 그 아래 동생 쯔잉(子瑩)이 있다. 양후이옌에 대한 모든 것은 비밀이다. 절대 언론과 인터뷰를 하지 않는다. 심지어 사진조차 구하기 어렵다. 그의 결혼식 동영상이 인터넷에 올랐을 때 클릭수가 시간당 400만 회를 넘었을 정도였다.

베이징= 진세근 중앙일보 특파원 sk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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