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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수 아래 ‘깨달음의 뿌리’를 만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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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25일 선묵 혜자 스님과 300명의 ‘108 산사 순례단’이 룸비니 동산을 찾아 마야 부인이 출산 전 목욕을 했다는 연못 주위를 돌고 있다. 뒤로 보이는 벽돌 건물이 마야 사원이다.

네팔인들은 “석가모니 부처님은 인도 사람이 아니라 네팔 사람이다”고 말한다. 이유가 있다. 부처님이 태어난 룸비니 동산이 네팔에 있기 때문이다. 석가모니는 인도에서 수행했고, 거기서 깨달음을 얻었고, 설법도 대부분 인도 땅에서 펼쳤다. 그러나 태어난 곳은 네팔의 룸비니 동산이다. 2300년 전 인도의 아소카왕이 방문해 세웠다는 돌기둥이 지금도 룸비니 동산에 남아있다. 돌기둥에는 ‘이곳 룸비니는 성인 붓다께서 탄생한 곳이므로 세금으로 생산물의 8분의1만 징수한다’는 글이 인도 고대 문자로 새겨져 있다.

궁금했다. 룸비니는 어떤 곳일까. 2500년 전에 삶의 고통을 여의었던 이. 그리고 45년 간 ‘깨달음’을 설하고서도 “나는 한 자도 설한 바가 없다”고 했던 이. 그가 태어난 룸비니는 어떤 꽃이 피고, 또 어떤 바람이 부는 곳일까. 23~27일 선묵 혜자(서울 도선사 주지 겸 불교신문 사장) 스님이 이끄는 ‘마음으로 찾아가는 108 산사 순례단’ 300명과 함께 룸비니 동산을 찾았다.

23일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 공항에 내렸다. 네팔 정부의 환영식이 놀라웠다. 불교계 최고 지도자인 촉기 님마 링포체 스님이 공항에 나왔다. 전통 악기를 불며 환영 퍼레이드도 펼쳤다. 그리고 만찬에는 그리자 프라사드 코이랄라 네팔 총리가 직접 참석했다. 코이랄라 총리는 “네팔은 선거를 앞두고 정치적으로 어수선하다. ‘108 산사 순례단’의 방문은 네팔 땅에 평화적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정말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튿날 순례단을 태운 버스는 룸비니로 향했다. 카트만두에서 룸비니까지는 약 250㎞이다. 버스는 가파른 산길을 지나야 했다. 도로는 몽땅 왕복 2차로. 새벽에 출발한 버스는 밤이 돼서야 룸비니에 도착했다. 부처님이 나고 자란 옛 카필라 왕국의 땅이었다.

밤이 깊었다. 300명의 순례단은 룸비니 동산에 갔다. 캄캄했다. 거기에 마야 부인이 아들을 낳기 직전, 몸을 씻었다는 연못이 있었다. 순례단은 연못 둘레에 3000개의 종이컵 촛불을 켰다. 장관이었다. 바로 앞에 커다란 보리수 나무도 있었다. 거기서 법회가 열렸다.

혜자 스님은 “지난달에 부처님 열반지인 인도의 쿠시나가라 열반당에서 ‘부처님 진신사리’를 기증받았다. 그걸 안고 이번에 룸비니 동산을 찾았다”고 말했다. 고향 땅으로 향하던 석가모니 부처님은 도중에 열반에 들고 말았다. 그때 머리는 고향 쪽으로 두었다고 한다. 혜자 스님은 “이번 순례는 진신사리를 안고 부처님을 대신해 고향 땅을 밟는 의미가 있다”고 덧붙였다.

룸비니 동산 위로 달이 떴다. 고개를 들었다. 캄캄한 밤, 별들이 무척 낮게 깔렸다. ‘훅’ 불면 ‘후두둑!’ 떨어질 것만 같았다. 깨달음을 얻는 순간, 부처님은 새벽별을 보고 있었다고 한다.

25일 날이 밝았다. 순례단은 다시 룸비니 동산을 찾았다. 거기서 룸비니 토박이인 네팔 승려 샴달 쉐레스타(70)를 만났다. 그는 “룸비니 동산에는 아쇼카 나무(접은 우산처럼 위가 뾰족하게 생긴 아열대지방의 나무)가 많았다. 마야 부인이 왕자를 낳을 때도 아쇼카 나무가 즐비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마을 사람들이 땔감으로 쓰려고 모두 베어버렸다”고 말했다.

인도와 가까운 룸비니는 아열대성 기후다. 꽃과 풀, 그리고 나무를 유심히 살폈다. 2500년 전과 지금, 자연은 크게 다르지 않지 싶다. 도선사 백영기 신도회장은 “부처님께서 사셨던 공간이 피부로 느껴진다. 이렇게 생긴 보리수 아래서 수행을 하고, 저렇게 생긴 꽃잎을 사람들이 부처님 앞에 뿌렸지 싶다. 그리 생각하니 붓다의 삶이 피부에 꽂힌다”고 말했다.

네팔 인구의 90%는 힌두교를 믿는다. 불교 신자는 10%가 안 된다. 그러나 네팔에서 힌두교와 불교는 둘이 아니다. 붓다의 깨달음 이후 네팔에서 보리수는 ‘성스러운 나무’로 통한다. 현지인인 마단 쉐레스타는 “네팔에서 사람이 죽으면 집 둘레에 보리수 잎을 따서 뿌린다. 보리수 잎은 사람의 영혼을 정화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 기도를 할 때 보리수 잎을 따서 강물에 띄우기도 한다. 네팔 사람들은 그걸 ‘신에게 보내는 메신저’로 여긴다”고 설명했다. 네팔에선 ‘붓다의 흔적’이 그렇게 생활 곳곳에 녹아 있었다.

‘108 산사 순례단’의 일정을 안내한 네팔인 가이드 람 하리 카드카(52)는 “네팔은 부처님이 태어나신 곳이다. 평화의 근원이 돼야 한다. 그런데 10년에 걸친 내전과 정치적 소용돌이로 인해 네팔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부처님 탄생지를 찾아가는 ‘108 산사 순례단’의 이번 방문이 네팔인에게 평화를 위한 ‘불씨’를 심는 셈”이라고 말했다.

룸비니(네팔)=글·사진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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