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공서하노이까지>2.승리와 비극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해피 애니버서리.』(20주년을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하지만 우리는 축제무드가 아닙니다.승리를 잊은지 오랩니다.갈길이멉니다.전쟁이 끝난지 2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전쟁을 하고 있으니까요.』 호치민(옛사이공)市의 호치민(胡志明)동상 앞에서 만난 대학생 다오 마퐁은 필자가 건넨 인사말에 이같이 대꾸한다.축제의 거리를 멋모르고 쏘다니는 어린 거지들을 몸짓으로 가리키는 대학생의 말뜻을 짐작할만하다.분단국에서 온 사람은 「남 북통일 20주년」이 부러워 축의를 보냈건만 되돌아오는 메아리는착잡하게 들린다.
베트남전쟁의 상처가 이토록 깊은 줄은 몰랐다.곳곳에 가난티가역력하다.
베트남에서 가장 활기찬 도시는 호치민市다.필자는 그 도심 한복판,이를테면 서울의 광화문(光化門)네거리에 서 있다.사이공이던 옛 수도는 간판이 내려지고 호치민市로 바뀌었다.30년만에 찾아온 나에게 낯선 것은 시청건물 정면에 세워진 호치민 동상이었다. 北이 南을 무력으로 밀어붙인 흡수통일의 상징탑처럼 비친다.동상의 주인공은 해방전쟁의 임무가 끝났음을 일러주듯 저 유명한 정글모(일명 호치민모자)를 벗은채 무릎에 어린 소녀를 안고 있다.
하지만 가난한 평화 상(像)은 허전하기만 하다.그 동상 뒤에는 프랑스 식민지의 시청건물이 빼어난 건축미를 여전히 뽐내고 있다.짧고 슬픈 월남 민주주의의 시험장이었던 옛 국회의사당은 할 일을 하노이에 빼앗긴채 인민문화회관이 들어서 있지만 조개껍질을 세워놓은 모양 그대로 온몸에 조명을 받고 서 있다.그 앞에는 전쟁 당시 사이공의 펜타곤이나 다름없던 렉스호텔이 보인다. 기자들과 장교들로 북새통을 이뤘던 미군사령부의 브리핑룸은 댄스홀로 바뀌고 베트남戰은 언론이 판가름냈다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바로 그 보도전의 배틀 필드가 이곳이었다.
카키服대신 지금은 드문드문 외국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지는게 고작이다.이 호화호텔들은 국영으로 넘어가 있다.
군인과 지프와 전쟁경기가 흥청대던 옛거리엔 세발 인력거와 오토바이,그리고 외제차가 뒤엉켜 구른다.외제차라야 고물딱지들이어서 시꺼멓게 내뿜는 배기가스에 숨이 막힌다.코와 입을 마스크로싸맨 새 풍속도가 거리에 생겨났다.
밤의 네온으로 분칠한 도시의 겉치레가 화려할 뿐이다.해방 20주년의 축제는 바로 그같은 속절없는 네온과 같았다.
하노이에서 내려온 고관들은 주렁주렁 훈장을 달고 어깨가 젖혀져 있지만 봐주는 이가 없다.가로수마다 아랫도리는 흰페인트칠을한채 금성홍기(金星紅旗)를 늘어뜨렸고 붉은 깃발을 머리에 인 해방탑 아치들은 한결 키가 낮아보인다.축제도시의 화려함은 여기서 끝났다.밤은 차라리 낮의 어둠을 덮어주고 있었다.렉스호텔 바로 뒤에는 벌거숭이로 등물을 하는 남녀가 보인다.하수구는 막혀 구정물이 대로(大路)에까지 넘쳐 질퍽거린다.대한민국 대사관이 위치했던(현재는 총영사관) 구엔 두거리만 해도 아스팔트는 벗겨져 있고 인도에 웅덩이가 푹 팬채 흙먼지가 풀썩인다.탄손누트공항은 활주로만 반반하지 택시웨이(유도로)는 거북등처럼 갈라지고,한키만큼 자란 잡초와 휑뎅그렁한 미군기 보호시설이 폐허처럼 남아 국제공항이란 네 온사인이 가여웠다.
공산정부는 인프라 투자를 엄두도 못낸다.세입세출의 원칙(Norevenue No spending)을 공언한다.베트남이 치르고 있는 전쟁은 빈곤과의 싸움만이 아니었다.싱가포르 前총리 리콴유(李光耀)는 『견제와 균형없는 정치가 외국투 자자를 놓치고있다』고 베트남 공산독재를 개탄한다.전쟁에 이기는 일이 평화를이기는 일보다 쉬웠는지 모른다.
미국과 옛 사이공은 아직도 하노이에 거리를 두고 있다.빈곤과부패,국제고립과 경제실패는 독재의 악순환 때문이다.
***지금은 빈곤과의 전쟁中 우리돈으로 하루 1천5백원 벌이를 하는 인력거꾼은 거의 절반을 교통순경에게 뜯긴다고 했다.작은 도둑이 나가고 큰 도둑이 들어온 격이란다.그래도 그는 행복하다 했다.왜냐하면 고향에 가면 그나마도 일자리가 없기 때문이다.부패의 먹이사 슬이 거미줄같다는 얘기다.전문성 없는 공산실세들이 구석구석 노른자위를 차지하고 「도장」을 쥐고 있어 기름을 치지 않으면 서류가 돌지 않는다.
「베트남 20년」은 종전(終戰).통일.해방.패망(敗亡)의 네가지 말뜻을 쓰는 이마다 다르게 사용한다.종전이라지만 빈곤과의전쟁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통일이라지만 군사적 통일일뿐 남북이질화의 골은 좀체 메워지지 않는다.
패망은 누구의 패망인가.패망한 것은 당시 정전담당자였을 뿐 베트남인이 패망한 것은 아니다.
해방은 외세를 몰아낸 한세기에 걸친 대장정(大長征)이었지만,외세를 등에 업은 독재를 쓰러뜨렸을 뿐 새로운 공산독재가 외세를 불러들이지 않고는 경제를 한발짝도 전진시킬 수 없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