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바루기] 온 국민을 놀래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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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1907년 요시히토(嘉仁) 일본 왕세자(훗날 다이쇼 일왕)의 서울 방문을 앞두고 숭례문의 좌우 성곽이 헐렸다. 비좁은 숭례문 주변을 정비한다는 명목이었지만, 실제론 대한제국 황실의 권위를 떨어뜨리려는 의도였다. 대한민국의 국보 1호이자 600년 넘게 지켜져 온 숭례문이 한 사람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으로 전소됐다. 대한민국의 자존심이 무너져 내린 것이나 진배없다.

“숭례문 화재 소식은 전 세계인을 놀래키고 있다” “재계약을 완료한 한화 구단이 야구계를 두 번 놀래키고 있다” “정명훈의 카리스마, 브람스를 놀래키다”처럼 흔히 쓰는 ‘놀래키다’는 표준어가 아니다. ‘놀래다’의 충청 지역 사투리(방언)다.

‘놀래다’는 ‘놀라다’의 사동형으로 ‘놀라게 하다’의 뜻이다. ‘~를(을) 놀래다’와 같이 목적어가 수반된다. “그들이 그에게 총격을 가해 온 것은 그를 놀래 주기 위한 것이 아니고 바로 그를 죽이기 위한 목적이었다”(홍성원 『육이오』) “북한 핵실험, 세계를 놀래다” “뒤에서 갑자기 나타나서 그를 놀래 주자”처럼 쓸 수 있다.

‘놀래키다’가 쓰인 문장에서 ‘놀래키다’를 단순히 ‘놀래다’로만 바꾸면 어색함을 느낄 때도 있을 것이다. 이럴 땐 문맥에 따라 ‘놀래 주다, 놀라게 하다’ 등으로 바꿔 쓰면 훨씬 자연스럽다. 놀란 주체가 주어면 ‘놀라다’를 써야 하고, 주어가 놀라게 한 행위자라면 ‘놀래다’를 쓴다고 보면 된다.

권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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