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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미국 ‘싱송 외교’ 시작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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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지휘자 로린 마젤이 북한 여성으로부터 꽃다발을 받고 기뻐하고 있다. [MBC-TV 촬영]

“지휘는 뉴욕 교향악단의 이름 있는 지휘자 로린 마젤 선생이 하겠습니다.”

26일 오후 6시 평양 동평양대극장. 북측 사회자가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뉴욕 필)를 소개했다. 인사말에 이어 하루 전 도착한 뉴욕 필 단원들이 기립했다. 북한과 미국의 국가가 차례로 연주됐다. 단원들은 경의를 표하기 위해 양국 국가를 서서 연주했다. 무대 왼쪽에는 미국의 성조기가, 오른쪽에는 북한의 인공기가 게양됐다. 미국 국가가 북한에서 실황으로 연주되기는 처음이다.

북한의 ‘애국가’는 느리고 장중했다. 북한 음악가동맹중앙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고(故) 김원균이 작곡한 것이다. 1500여 명의 평양 관객은 모두 일어나 양국 국가를 경청했다. 남성 관객은 양복, 여성 관객은 한복 차림이 대부분이었다. 미국과 북한의 오랜 불신을 씻어낼 촉매제로 기대되는 뉴욕 필의 역사적 평양공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날 연주된 음악 또한 각별했다. 드보르자크의 ‘신세계로부터’ 교향곡, 미국 작곡가 거슈윈의 ‘파리의 미국인’은 모두 미국과 관련이 깊은 곡이다. 북한 정부의 고위층으로 이뤄진 객석의 분위기는 차분했다. 지휘자 로린 마젤은 연주곡을 소개하며 “좋은 시간 되세요” “즐겁게 감상하세요” 등 미리 연습해온 우리말도 쓰며 분위기를 돋웠다.

예정된 세 곡의 연주가 박수 속에 계속됐다. 뉴욕 필은 첫 앙코르 곡으로 자신들의 주특기인 비제 작곡 ‘아를의 여인 모음곡’ 중 ‘파랑돌’(프랑스 지방의 춤곡)을 연주했다. 이어 뉴욕 필의 종신 지휘자였던 레너드 번스타인의 오페레타 ‘캔디드’ 서곡을 들려줬다. 마지막 곡은 한민족 전통 민요인 ‘아리랑’이었다. 공연 당일 오전 알려진 것과 달리 북한 연주자 6명은 ‘아리랑’ 연주에 참가하지 않았다. 앙코르 연주가 모두 끝나자 뉴욕 필 단원들과 관객들은 서로 손을 흔들며 5분 넘게 공연장을 떠나지 않았다.

마젤은 공연 전 기자회견에서 “북한은 문화적 전통이 강하며 북한 주민도 음악과 문화를 사랑하고 있다”며 “앞으로 미국 중창단이나 가극단·무용단이 북한을 방문하는 등 사회적 교류가 강화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날 공연은 전 세계로 중계됐다. 북한 측도 TV와 라디오를 통해 100여 분의 공연을 생중계했다. 다만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참석하지 않았다. 공연이 끝난 후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 대사는 “오늘 오후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과 함께 김계관 6자 회담 북측 수석 대표를 면담한 자리에서 ‘지금이 북핵 문제를 즉시 해결할 시기’라는 의견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미국을 포함한 각국 언론은 한국전쟁 이후 가장 많은 미국인이 북한을 방문한 사실에 큰 관심을 보였다. 특히 지난해 6자회담국 간 ‘2·13 합의’ 이후 북핵 문제가 교착상태에 빠진 상황에서 뉴욕 필의 공연이 이를 해결하는 새 돌파구로 작용할지 주목했다. .

워싱턴 포스트는 1971년 미국과 중국 간 ‘핑퐁외교’에 빗대 “뉴욕필 공연은 ‘싱송(Sing Song) 외교’의 새 장을 열 역사적인 공연이며 연주 자체가 평양 주재 미국대사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러시아 국영 NTV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참석 여부를 떠나 ‘바이올린 외교’의 성과”라고 전했다.

중국을 방문 중인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뉴욕필의 평양 공연은 좋은 일이지만 북한 정권은 여전히 북한 정권”이라며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한편 영국 일간 파이낸셜 타임스는 북한이 ‘원더풀 투나잇’으로 유명한 영국의 세계적 기타리스트 에릭 클랩턴을 내년 평양에 초청했다고 26일 보도했다. 런던 주재 북한 대사관은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내년 초 클랩턴이 일본에서 공연할 시기에 맞춰 평양에 갈 가능성이 크다”고 확인했다.

평양=김호정 기자, 서울=김정욱 기자

◇성조기여 영원하라=미국의 국가. 19세기 초 영국의 유행가인 ‘천국의 아나크레온에게’의 가락에 미국 시인이자 변호사인 프랜시스 스콧 키가 쓴 시를 가사로 붙였다. 작곡자는 존 스태퍼드 스미스다. 1931년 후버 대통령 때 공식 국가로 제정됐다. 원래 영어 제목은 ‘별이 빛나는 깃발(The Star-Spangled Banner)’이다. 주한 미국 대사관 홈페이지에는 ‘성조기여 영원하라’로 번역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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