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Style] 기나긴 전쟁 … 짧아진 치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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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20세기 초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했던 뤼시앙 르롱의 1928년 작품이다. 르롱은 크리스티앙 디오르, 위베르 지방시도 그의 밑에서 일했을 만큼 뛰어난 쿠튀리에였다. 사진은 일상복으로 디자인한 스웨터와 자연스러운 실루엣의 투피스다. [에지디오 샤이오니/갈리에라(Egidio Scaioni/Galliera) 제공]

◇질문1: 여자들이 짧은 치마를 입기 시작한 때는 언제일까.

◇질문2: 언제부터 (유럽의) 길거리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여성들이 담배를 피웠을까.

◇질문3: 가슴이 드러나는 옷을 입게 된 것은 또 언제부터일까.

지금은 너무 당연한 일이라 언뜻 해답이 떠오르지 않는 질문들이다.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고 있는 한 전시회에서 찾았다. 전시회 이름은 ‘광기의 시대(1919~1929)’. 올 초부터 파리에서 문을 연 이 전시는 프랑스 파리가 왜 ‘세계 패션의 심장’인지를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인 이때(1919년)부터 파리를 중심으로 창의력 넘치는 패션 디자이너의 활약이 그야말로 ‘광기처럼 불어 닥쳤기’ 때문이다. 당시의 오트 쿠튀르는 사회의 격변만큼이나 빠르고 놀랍게 변했다. 개선문 근처인 갈리에라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이 전시는 현대 의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20세기 초반 오트 쿠튀르 작품들을 엄선해 관객들에게 선보이고 있다. 예술로서의 패션인 오트 쿠튀르를 보존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데 있어 파리라는 도시의 중요성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3년 여에 걸쳐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1920년대 오트 쿠튀르 작품을 수집해 온 갈리에라 갤러리는 당초 이달 말까지로 예정돼 있던 전시를 관람객 요청에 따라 다음달 31일까지로 연장했다.

위 질문에 대한 답부터 밝히자면 모두 ‘채 100년도 안 됐다’. 정말 그럴까. 이유를 살폈다. 

◇트럭 몰고 일할 여성 위해 짧은 치마 등장=프랑스는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던 20세기 초반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던 전장이었다. 남성들은 모두 군대로 끌려갔다. 18세기 이래 여성들은 코르셋으로 허리를 꽉 조이고 목까지 올라오는 점잖은 드레스만 입었다. 하지만 이제 여성들은 전쟁터로 나간 남성들을 대신해 트럭을 몰고 일을 해야 했다. 당장 옷이 문제가 됐다. 쿠튀리에(오트 쿠튀르를 만드는 사람)인 폴 푸와레는 길이가 깡총한 드레스를 디자인했다. 무릎 바로 아래 길이 정도였다. 점잖은 부인이 정강이 아래를 드러낸 것은 예뻐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였던 것이다. 전시의 홍보담당자 코린느 마뉴는 이에 대해 “이때부터 여성들의 몸은 코르셋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게 됐다”고 설명했다.

랑방에서 디자인한 ‘셀렉트’라는 이름의 망토와 ‘푸른 새’라는 제목의 원피스 데생. 1925년 작이다. [랑방/실뱅 바르댕(Patrimoine Lanvin/Sylvain Bardin) 제공]

전쟁으로 지친 몸을 쉬게 하려니 퇴근 후엔 음악도 필요했다. 때마침 미군들이 프랑스로 오면서 ‘폭스-트로트’라는 빠르고 경쾌한 음악도 유행이 됐다. 빠른 박자에 맞춰 양쪽 다리를 들었다 놨다 하기에도 짧은 치마가 어울렸다.

◇사회적 위상 높아진 여성들, 남성복에도 관심=여성들의 사회활동이 늘어나자 이들의 사회적인 목소리도 점점 커졌다. 남성들이 입었던 바지 정장이나 중절모를 쓰고 파이프 담배를 문 여성들이 길거리에 나타났다. 소년이란 뜻의 프랑스어 ‘가르손’에 여성을 나타내는 접미사를 붙인 ‘가르손느’는 이들을 지칭하느라 생긴 신조어였다. 전쟁의 영향으로 사회가 급격하게 변하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도 빠르게 바뀌면서 생긴 이런 새 여성상을 영국 등지에선 ‘플래퍼’로 불렀다. 무성영화 시대의 유명 여배우 클라라 보가 대표적인 플래퍼다.

깃털 장식 요란한 챙 넓은 모자 대신 짧은 머리에 어울리는 작은 모자가 신여성의 유행이 됐다. 헐렁한 실루엣의 옷은 자연스럽게 가슴이 드러나도록 디자인 됐다. 엘자 스키아파렐리나 코코 샤넬, 장 파투, 잔 랑방 같은 희대의 디자이너가 이런 흐름을 이끌었다. 

‘광기의 시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뿐 아니다. 전쟁 이전에는 술집 여인이나 했던 진한 화장이 뭇여성에게도 퍼지게 만든 화장품 대량생산 시대의 초기 상품, ‘아시아=일본’이라는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해 일본식 문양이 잔뜩 들어간 20년대 오트 쿠튀르 의상은 ‘21세기 오트 쿠튀르’의 손때묻은 족보다.  

파리=강승민 기자

오트 쿠튀르 패션쇼는…
샤넬·디오르 등 참가
‘파리 프레타 포르테’3대 컬렉션과 다른 멋

오트 쿠튀르 패션쇼는 파리·뉴욕·밀라노에서 열리는 ‘세계 3대 컬렉션’의 기성복 패션쇼와 다르다. 샤넬이나 크리스티앙 디오르 같은 브랜드가 참가하는 기성복 패션쇼는 ‘파리 프레타 포르테’다. 프레타 포르테는 오트 쿠튀르의 예술성을 기반으로 더 일상적인 옷을 만들어 낸다. 샤넬의 대표적 의상인 트위드 재킷만 해도 오트 쿠튀르의 것에는 장인의 손 자수 장식이 훨씬 더 많이 들어 있고, 단추 하나 역시 예사로 쓰이지 않지만 프레타 포르테 의상은 한결 단순하게 디자인된다. ‘맞춤’이기 때문에 더 특별한 것은 물론이다.

지난달 파리에서 열린 올봄 시즌용 오트 쿠튀르 패션쇼에 참가한 다른 디자이너들 역시 이런 경향을 충실하게 보여줬다. 존 갈리아노가 빚어낸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오트 쿠튀르 패션쇼는 원색의 실크 드레스로 일렁였다. 검정색으로 꾸며진 무대 한가운데에 잔잔한 개울이 흘렀고 인어꼬리를 닮은 ‘머메이드 드레스’는 평범하지 않았다. 드레스 끝자락을 단순히 인어 형태로 끌리게 만든 것이 아니라 조금 뻣뻣한 소재인 오르간자 실크의 느낌을 살려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

이번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한 발렌티노 가라바니는 자신의 상징인 커다란 리본 장식을 테마로 한 패션쇼를 펼쳤다. “여성의 의상은 우아해야 한다”고 강조해 온 패션계의 거장은 마지막 무대에서도 원칙을 지켰다. 머리 위에서 모자로 변형된 이 리본 장식은 마치 밤거리 여인이라 해도 이것만 쓰면 공작부인처럼 보일 만큼 고상했다.

조르조 아르마니는 차분한 색상에 비즈(구슬 장식)와 크리스털의 화려함으로, 지방시의 리카르도 티시는 붉은 색 드레스의 강렬함으로 객석을 감동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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