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남기자의영화?영화!] 덜 나쁜 사람 … 더 나쁜 사람 …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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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영화 제목요? 제가 지었는데, 별별 타박을 다 들었어요. 추격 장면을 하도 여러 날 찍기에 한 소리 했더니 감독이 그러더군요. 우리 영화가 ‘추격자’잖아요, 라고. 개봉 첫 주에 1등을 못 해서 속상해 하니까 프로듀서도 그러더군요. 우리 영화가 ‘추격자’니까 이제부터 추격하면 된다고요.”

영화사 비단길의 김수진 대표가 최근 들려준 푸념입니다. 신인 나홍진 감독을 발굴해 2년여를 작업한 끝에 영화 ‘추격자’(사진)를 내놓은 제작자입니다. 개봉 이후 충무로 안팎에서 쏟아지는 호평을 감안하면 이제는 행복한 푸념이죠. 흥행 역시 첫 주에는 할리우드 영화에 밀리더니 이내 추격에 성공한 상태입니다. 연쇄살인범을 쫓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추격자’는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을 떠오르게 합니다. 물론 짚어보면 다른 점이 많습니다. 우선 ‘살인의 추억’이 농촌 스릴러라면, ‘추격자’는 도시 스릴러입니다. 특히 살인범을 쫓는 주역이 ‘살인의 추억’은 능력이 좀 떨어질망정 직책은 형사인 반면, ‘추격자’는 전직 형사이되 현직은 출장안마 업소의 사장입니다. 몸이 아프다는 여자를 억지로 일 내보내는 것만 봐도 양질의 인간은 아니지요. 그 인물을 박하게 평하자면, 나쁜 놈인 사장이 더 나쁜 놈인 연쇄살인범을 쫓는 얘기가 바로 영화 ‘추격자’입니다.

흔히 할리우드 장르 영화에서는 세상이 선과 악으로, 정의로운 영웅과 악당으로, 수퍼맨과 그의 적들로, 배트맨과 조커로 뚜렷하게 나뉩니다. 살아본 사람이라면, 세상이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마련입니다. 선한 사람이 선한 의도로 선행을 이룬 완벽한 조합이 늘 있는 게 아니지요. 선인의 선의가 나쁜 결과를 빚기도 하고, 별로 선하지 않은 의도가 때로는 좋은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극단적인 경우의 수로 따지면, 악당이 정의를 실현하는 조합도 등장합니다.

예전에 이준익 감독에게 들은 말이 생각납니다. ‘위악’은 ‘위선’보다 나쁘다고요. 위선은 악한 데 선한 척하는 것이고, 위악은 선한 데 악한 척하는 것이지요. 그의 지적은, 선하다고 스스로 전제하는 것부터가 의심스럽다는 뜻으로 기억됩니다. 그렇다고 선을 행하기 위해 악에서 출발하라는 얘기는 당연히 아닙니다.

이제껏 지구가 악당의 손에 장악되지 않은 것은, 이 복잡다단한 선악의 벡터가 그래도 선의 방향을 향한 결과가 아닐까 합니다. 영화 ‘추격자’의 업소 사장이 설령 나쁜 놈이라고 해도, 업소 여자들의 실종을 아예 모른 척했다면 진짜 나쁜 놈이 됐겠지요. 그나마 덜 나쁜 놈의 길을 택한 것이 범인에 대한 집요한 추격으로 이어집니다. 이 미묘한 상황을 돌아보면, ‘무법자’도 ‘정의파’도 아닌 ‘추격자’라는 우직한 제목이 상당히 정직하게 보입니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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