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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한국현대사>15.그림자조직 美CIC 下.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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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점령군의 촉수로 활동하게 될 미군방첩대가 한국에 처음 들어온것은 45년9월9일이었다.이들은 224파견대로 명명된 부대의 요원들로 미국전함 칠튼호를 타고 인천항에 처음 도착했다.이들은2차대전 동안 필리핀의 레이테와 일본의 오키나 와(沖繩)에서 활동하던 베테랑들로 짜여져 한국에서 전개될 작전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진용이었다.
방첩대의 내규에 따르면 이들이 한국에 파견되면서 부여받은 임무는 「미군정 체제및 미군정의 사법관할권에 대한 간첩행위와 태업행위를 무력화 또는 사전 검색.예방및 반국가사범.체제전복 활동.정부에 대한 불만자 등을 색출,미군정의 운영에 기여하는 것」으로 사실상 미군정의 진로에 방해되는 모든 행동에 관여할 수있는 광범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엄청난 임무와는 달리 224파견대의 지휘체계는 급조된감마저 있었다.초기 224파견대의 대장은 처음 몇주동안 바이런뮤러트중령이 맡았으며 서울에 위치하고 있던 24군단 본부에 소속됐었다.
224파견대 요원들은 베테랑들이었지만 2차대전을 치르면서 제대가 임박해 있거나 과중한 업무에 지친 상태였다.실제 224파견대 요원들의 대부분은 서울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초대 대장뮤러트는 곧 도쿄(東京)로 돌아가 윌리엄 고든대 위와 교체됐으며 고든도 곧 밴 홈스대위와 임무를 교대했다.
초기의 엉성한 지휘체계를 짜임새 있게 조정하기 위해 46년2월13일 224파견대는 대대적인 조직개편을 단행했다.224파견대는 서울에 계속 남아 전국 방첩대의 활동을 장악했다.6,7,40 지구파견대는 전투부대에 소속된 채 부산.서울 .대구에 각각 배치됐다.새로운 지구파견대도 창설됐는데 1034는 대전,1035는 송도,1036은 인천,1110은 광주,1111은 전주지역을 맡았다.이때까지 한국에 파견된 방첩대 요원은 모두 57명이었다.
46년4월1일 또한번의 조직재편이 있게 되는데 모든 방첩대는971파견대로 편입돼 잭 리드소령의 관할하에 들어갔다.그는 필리핀에 있다가 한국으로 옮겨왔다.971파견대는 24군단의 정보참모부(G2)아래서 활동했다.그리고 어느정도 4 41파견대의 지시도 받고 있었다.직원들은 441파견대로부터 공급받았으며 본국 정부에 보내는 모든 보고서는 441파견대를 통해 전달했다.
방첩대의 조직상 인원은 1백26명이었으나 이 인원이 모두 채워진 적은 없었다.방첩대 활동이 가장 강력했던 46년9월의 경우에도 겨우 89명만이 채워졌을 뿐이다.또 파견대장도 중령자리였으나 48년2월에 가서야 이러한 계급의 책임자가 부임했다.
방첩대의 인원 부족은 방첩대가 아무런 조직적 준비나 계획 없이 한국에 진주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이러한 준비부족은 방첩대운영면에서 더욱 두드러졌는데 방첩대 내규가 확정된 것이 진주한후 1년6개월이 지난 47년3월29일이었다.내 규에 따르면 파견대장은 미육군참모부.정보참모본부.주한유엔군사령부의 명령을 받게 돼 있었다.
***한국인 요원 방첩대는 12명의 한국인 2세 요원들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대부분 이들은 하와이에서 왔다.이 가운데 윌리라는 미국이름의 이순용(李淳鎔)은 한국에서 태어났으나 뉴욕에서20년을 지낸 경험이 있었다.그는 美육군전략정보처(OSS)에서2 차대전동안 일한 다음 한국으로 왔다.이순용은 출신가문이 많은 고위층 인사들을 접촉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어 방첩대가 가장 아끼는 요원중의 하나였다.
그는 방첩대 근무를 그만둔 후 51년 체신부 국제전화국 고문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해 같은해 1월 6대 내무장관,52년 3대체신부장관등을 역임했다.2세들의 눈부신 활약에 고무된 방첩대는48년4월 2세 인원을 40명으로 늘렸는데 이 러한 수치는 한국인들을 감시하고 한국기관들과 연락을 취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것이었다.
***북한의 마스터 플랜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했을 때 남한에주둔했던 방첩대 요원들에게는 전혀 뜻밖의 일이 아니었다.미군방첩대 요원중의 하나였던 케네스 맥두걸대위는 철수 직전 방첩대 요원들의 조심스런 관측이 미군 철수후 6개월 이내에 북한이 남한을 침공한 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미군이 진주하고 있는 동안에도 38선을 사이에 두고 무력충돌이 끊임없이 있었다.북한군과의 충돌이 빈번해졌고 미군정보기관은 북한군 자신들도 모르는 공격날짜만을 제외한 모든 정보를 확보하고 있었다.이러한 정보는 맥아더장군의 정보참모부를 통해 미국정부에 정기적으로 보고됐다.
***한국정보조직 48년7월 미군방첩대가 곧 철수할 것이라는사실을 안 이승만(李承晩)대통령은 토머스 와틀링턴(24군단 정보참모부 소속)대위.에릭슨(한국경찰고문)중령등과 수차례 회의를거쳐 미군방첩대를 본뜬 조직이 한국에도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 다. 이에 따라 미군방첩대의 임무를 인수하기 위한 작업이 민간과 군 등 두갈래로 진행됐는데 허킨스대령은 이 작업을 위해데오도어 로버츠와 리처드 폭스(971파견대소속)대위를 조직의 구성.조직원 훈련 등을 위한 책임자로 임명했다.민간부문 에서는우선 훈련소가 국립경찰학교에 설립돼 처음 6주코스의 과정이 48년7월 중순에 시작됐다.
이 조직은 한국조사국(KOREAN RESEARCH BUREAU)으로 명명됐으며 정원은 3백15명이었다.1기생은 단지 60명만 졸업했다.그러나 곧이어 2백40명의 또다른 기수가 경기중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1기생중 훈련성적이 좋은 학생들은 훈련교사로 일하기도 했다.
2기생들이 10월초 졸업후 미군방첩대의 지구파견대에 배속됐다.국회가 연구소를 정부의 공식기구로 인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경찰청내에 특수수사대라는 수사기구를 설치할 필요가 있었다.
경찰중에서 선발된 간부들은 한달가량의 대간첩작전 훈련을 받고 지방으로 내려가 방첩대의 파견대와 같은 지방조직을 만들었다.
다른 한편으로 미군방첩대는 한국군에서 정보요원들을 뽑아 미국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방첩대훈련소에서 직무훈련(OJT)이라는 이름으로 교육에 들어갔다.1차훈련에는 위관급 장교 41명이 입소,48년9월27일부터 10월30일까지 한달간 교 육을 받았다.
한국특무대학교(KOREAN SIS SCHOOL)로 이름 붙여진이 훈련에는 후에 특무대장으로 악명을 떨친 김창룡(金昌龍.육사3기)대위.김안일(金安一.육사2기)소령 등도 들어 있었다.이 가운데 김안일은 초대 특무대 대장을 역임했으며 여순군사반란사건직후 단행된 숙군작업에서 박정희(朴正熙.당시 소령)前대통령을 좌경혐의로 취조하기도 했다.
미군방첩대와는 별도로 한국군에서도 방첩대 철수가 가져올 공백에 대비하기 위해 작업이 진행됐다.육군정보국 특별수사과를 특무대(SIS)로 개칭하고 공비가 출몰하는 광주.전주.부산.진주 등에 파견대를 설치했다.이어 49년10월21일에는 육군본부 일반명령 제91호에 따라 육군정보국으로부터 완전 독립된 육군특무부대를 창설하고 초대 대장에 김형일(金炯一)대령을 임명했다.특무부대는 60년 방첩대로,68년에는 육군보안사령부로 각각 이름을 바꿔 군정보기관으로서의 맥을 잇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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