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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사회론 울리히 벡 교수 특별대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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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위험사회’ 이론의 주창자 울리히 벡 독일 뮌헨대 교수와 한상진 서울대 교수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울리히 벡 교수는 오는 3월 29일 서울대 초청으로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우리 사회의 안전불감증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높다. 숭례문과 정부종합청사에 발생한 잇단 화재 때문에만 그런 것은 아니다. 군헬기 추락사고도 그렇고, 따지고 보면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의 붕괴도 얼마전 일이었다. 각종 교통사고와 환경생태오염에 상시적으로 노출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독일의 저명한 사회학자 울리히 벡(64·뮌헨대) 교수는 ‘위험사회(risk society)’라는 개념을 1980년대 중반 체계적으로 제시해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산업사회에서 경제가 발전할수록 위험요소도 증가한다는 주장이다. 현대인들이 건강과 생태 환경에 관심을 쏟고 각종 보험에 가입해 놓는 행위도 결국 불확실성의 불안을 극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따라서 국가 정책의 최우선 과제는 사회적 안전장치 마련에 맞춰져야한다는 것이 위험사회론의 논리적 귀결이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면서도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잇따라 터지는 21세기 대한민국의 ‘불안한 풍요’는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론’의 적용이 가장 필요한 곳은 아닐까.

그 울리히 벡 교수가 3월 29일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한다.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가 주최하는 ‘서남 강좌’에 초청 연사로 참석하기 위해서다. 첫 방한에 앞서 그가 독일 뮌헨시의 자택에서 서울대 한상진(63·사회학) 교수와 대화를 나눴다. 지난 1월 30일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된 대담은 이달 말 출간될 계간지 ‘사회비평’(2008 봄호)에 실릴 예정이다. 본지는 두 교수의 대담 내용을 미리 입수해 요약게재한다.

배영대 기자

대담 = 한상진 서울대 교수

 한상진(이하 한)=당신의 첫 한국방문을 앞두고 이렇게 사저에서 만나게 되어 기쁘다. 서울대 강연 등을 앞두고 있는데, 한국에서도 당신의 위험사회론에 대한 관심이 높다. 위험의 광범위한 확산을 강조해왔는데, 결국 위험사회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가 문제가 된다.

울리히 벡(이하 벡)=제1차 근대화의 특징은 기존의 제도를 동원하는 것이다. 이것은 통제기구의 합리성을 신뢰하는 방식이다. 모든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전제 위에서 어떤 사고가 발생했을 때 그 사고를 예외로 인정하고 정상화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이것은 제도의 작동방식 안에 위험이 내장되어 있다는 점을 무시한다. 그럴수록 우리는 증대하는 불확실성에 직면하며, 이것이 급진화된 것이 바로 위험사회이다.

=한국이나 중국처럼 급속히 고도성장하는 나라들에서 위험은 더 심각하고 광범한 것 같다.

=의료·환경·식품·실업·사고 등 위험들이 많다. 문제해결의 가장 중요한 행위자는 국가다. 위험을 관리하는 국가의 역할은 모순적일 수 있다. 산업발전을 촉진하면서도 그 결과로 나오는 위험을 관리해야 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이 때 국가는 산업체의 이익이나 결정만을 따를 수 없다. 오히려 자신의 고유한 정책수단들을 개발해야 한다. 그것은 곧 시민들의 요구와 권익을 고려하여 시민의 입장에서 문제를 보는 것이다. 국가정책의 기본방향이 시민의 안전에 대한 기본 권리를 중심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런던정치경제대학(LES)의 2006년 공개강연에서 당신은 위험사회론이 비판이론의 전통을 이어간다고 밝혔다. 의미심장한 발언이다.

=성찰적 근대화의 핵심 테마는 근대성의 원리가 급진화되면서 근대 제도들을 무너뜨리는 위기를 야기한다는 것이다. 보기를 들자면, 시장경제의 원리가 급진화면서 이것이 국가경계를 넘어 전면화 된다. 이것이 기존 국가체제의 위기를 불러온다. 개인의 자율성 원리가 기존의 성역할 또는 국가주권을 넘어 급진화되면서 인권이 세계적 관심을 끈다. 과학이 급진화되면서 기존의 과학 경계를 허무는 새로운 혁신들이 줄을 잇고 있다.

=근대화의 성공에서 연유하는 변혁의 요소들이 있다. 그러나 실업이나 금융위기 같은 위험요소들도 있지 않는가.

=우리는 근대성의 기본원리와 제도를 구별해야 한다. 기본 원리의 급진화가 제도를 해체한다는 것이 나의 명제다. 여기서 비판적 시각이 나오며 이것이 사회학에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실업문제를 생각해보자. 노동시장이 성공할수록 시장의 사회통합력은 저하된다. 노동의 합리화, 자동화 과정을 따라 노동시장이 자체를 해체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생산체제의 초국가화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상태에서 완전고용의 개념틀로 노동시장의 문제를 보는 것이 가능한가? 나는 이런 가정에 깊은 의문을 느낀다. 노동이 개인정체성의 중심이자 정치참여의 중심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고 본다.

=당신은 계급보다는 ‘개인화’를 강조하는데, 이것은 ‘소유적 개인주의’의 현대적 표현이라는 주장도 있다. 즉 개인화가 계급경계를 넘어서는 현상이 아니라 특정한 계급현상, 즉 중간계급의 문화에 다름 아니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논쟁에는 관점의 충돌이 있다. 계급사회학은 국민국가의 틀 안에 갇혀 있다. 새로운 다양성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개인화의 과정은 법에 매개되어 제도화된다. 가족법, 이혼법, 노동 등에 관한 사회보장법 등에 연결되어 개인화는 사회구조의 특성을 이룬다. 이런 구조화의 과정에서 계급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새로운 사회불평등이 엄청나게 증가한다. 이주노동자 문제는 좋은 보기다. 때문에 보다 섬세하고 세련된 접근을 요구한다.

=우리는 그동안 국민국가의 출현을 근대성의 특징으로 생각해왔다. 그러나 당신은 코스모폴리탄 시각을 강조하고 있어 다소 혼란스럽다.

=과거 어느 시대보다 오늘의 상황은 훨씬 더 복잡하다. 놀라운 지구적 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물론 국민국가는 아직도 중요하다. 그러나 새로운 차원이 증가하고 있으며, 분석적 규범적 차원의 코스모폴리탄 시각이 사회학에 필요하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신자유주의자들이 주도해온 세계질서의 문제에 대해 귀하는 코스모폴리탄 시각으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것 같다. 이것이 세계화와 어떻게 다른지 명확히 밝혀 달라.

=세계화 시각은 밀접하게 경제와 연결되어 있다. 경제이론, 이데올로기가 전면에 등장한다. 그러나 사회과학이 보는 현실은 훨씬 더 복잡하다. 한 보기로 기후변화의 문제에 직면하여 우리는 갈등하는 여러 시각들에 부딪친다. 과거에는 힘에 의해 다른 국가를 배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시각을 다 포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지구적 정의(正義)를 실현할 수가 없다. 정치적, 도덕적으로 타자를 모두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 코스모폴리탄 정치의 특징이다.

=혹시 부지불식간에 신자유주의의 함정에 빠질 위험은 없는가.

=위험에 처한 세계에 대하여 신자유주의는 분석도 없고 아무런 해답을 주지 못한다. 시장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사회과학의 새로운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2주 전에 파리를 다녀왔다. 미국·프랑스·중국의 외교전문가, 학자들을 만났다. 미국 하바드 대학의 조셉 나이 교수의 발언은 매우 성찰적이었다. 부시 대통령의 일방적 패권정치는 붕괴되었고 80%의 미국 시민이 거부한다고 했다. 새로운 세계질서의 개념으로 유럽의 코스모폴리탄 전통이 재발견될 수도 있다.

=미국의 사회학자 밀스(Mills)는 일찍이 ‘사회학적 상상력’을 강조했다. 당신은 새로운 상상력으로서 코스모폴리탄 미래를 강조하는 것 같다.

=옳은 지적이다. 제1기 근대화 과정의 사회학적 상상력은 국민국가의 틀 안에서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지만 이것은 단선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것이었다. 오늘의 상황은 훨씬 다원적이고 복합적이다. 타자와의 대화가 요구되며 코스모폴리탄 상상력이 요구된다. 이것이 사회학에 새로운 영감과 에너지, 과제를 제공할 것이다.

=현대의 특징인 정보화의 진전은 한국에서 매우 인상적이다. 이에 따라 새로운 위험이 증가하는 한편 시민들의 참여증가와 세계시민사회 같은 새로운 가능성도 열린다. 이런 양면성을 동시에 포착해야 하는 것 아닌가.

=전적으로 동의한다. 인터넷 기술은 모든 사회발전의 기초가 된다. 정보기술 혁명에 따른 새로운 위험의 분석과 함께 이것이 열어주는 새로운 가능성을 다 같이 보아야 한다.

=동아시아에 대한 경험이나 인상을 소개해 달라.

=2007년 여름 중국을 방문했다. 서구가 발전시킨 개념 틀이 적용되지 않는 현실이 흥미로웠다. 사기업과 국가의 관계는 서구의 눈으로 보면 모순적이지만 중국에서는 효율적인 방식일 수도 있다. 사적으로는 개인화가 현저히 이루어지면서 공적인 쟁점을 다루는 방식은 서구와 매우 다르다. 이것은 근대화가 일어나는 상이한 역사적 배경 때문일 수도 있고 아예 다른 근대성을 중국이 경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런 차이를 인정하고 토론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한국이나 중국 같은 동아시아 국가에서는 세계패권의 시각과는 다른 문화전통에서 위험사회를 극복하고 코스모폴리탄 연대를 추구하려는 시도들이 적지 않게 있다.

=곧 있을 한국방문 때 위험사회에 대한 논의들을 경청하고자 한다. 우리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은 일방적인 강의가 아니라 쌍방향의 대화이며 경험의 교류이다.

왜 '위험사회'인가

울리히 벡 교수는 1986년 독일에서 출간한 『위험사회』에서 현대사회를 ‘위험사회’라고 규정했다. 그에 따르면 근대 산업사회는 거대한 풍요와 엄청난 위험을 모두 가져왔다. 근대화 초기엔 풍요의 확보가 중요했지만, 근대화 후기로 갈수록 위험 요소가 더 커지게 된다. 위험은 후진국 현상이 아니라 과학기술과 산업이 성공적으로 발달한 사회에서 나타나며, 무엇보다 예외적 위험이 아니라 일상적 위험이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존재한다. 위험은 성공적 근대가 초래한 딜레마다. 따라서 과학과 산업의 부정적 위험성을 줄이고 궁극적으로 ‘성찰적 근대화’의 방향으로 사회를 재구성해야 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1997년 홍성태(상지대 사회학과) 교수가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새물결 출판사)를 번역해 국내에 소개했으며, 지난해 나온 홍 교수의 저서 『대한민국, 위험사회』(당대)도 위험사회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미래를 위한 공학 실패에서 배운다』(김수삼 외 지음·김영사), 『우리는 안전한가』(무라카미 요이치 지음·유승을 옮김·궁리) 등도 참고할 만하다.

◇울리히 벡 교수는

1944년 독일 슈톨프 출생. 위르겐 하버마스, 앤서니 기든스와 함께 유럽에서 가장 저명한 사회학자의 한 명으로 손꼽힌다. 1986년 저서 『위험사회』를 통해 현대 산업사회를 분석하는 핵심 개념으로 ‘위험’을 제기해 크게 주목받았다. 그는 근대화의 성공과 경제적 풍요가 동반한 대형 사건사고의 위험을 지적하면서, 지금까지 진행되어온 것과 같은 근대성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근대 혹은 ‘제2의 근대’로 나아갈 것을 제안한다. 뮌헨 대학에서 사회학 박사학위 . 현재 뮌헨 대학 사회학연구소장 . 저서로는 『성찰적 근대화』『정치의 재발견』『적이 사라진 민주주의』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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