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Story] ‘월가 낚시’ 너무 서둘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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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질 만큼 떨어진 줄 알았다. 그래서 들어갔다. 그런데 아니었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FT)가 20일(현지시간) 미국·유럽 금융회사 지분 쇼핑에 나선 아시아·중동 국부펀드를 비꼬고 나섰다. “투자 시기를 정말 제대로 잡았느냐”는 것이다.

고유가로 넘쳐나는 달러를 주체하지 못하는 중동 국부펀드들은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화 사태로 위기에 몰린 미국·유럽 금융회사에 돈을 쏟아부었다. 아시아 국부펀드들도 마찬가지다. 중국투자공사(CIC)가 지난해 12월 모건스탠리에 50억 달러를 투자했고, 싱가포르 테마섹은 메릴린치에 44억 달러를 보태줬다. 한국투자공사(KIC)도 지난달 메릴린치에 20억 달러를 투자했다. 모두 합쳐 600억 달러 규모다.

문제는 글로벌 금융사들의 ‘첨단 시스템’ 속에 꼭꼭 숨어 있던 부실이 끝도 없이 터져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당초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금융사들의 손실이 최대 1500억 달러 정도일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두 배도 훨씬 넘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유럽계 투자은행 UBS는 지금껏 드러난 것 외에 추가로 늘어날 손실이 2030억 달러에 달할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놨다. 독일 페어 슈타인브뤼크 재무장관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관련 손실이 40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나올 손실은 대부분 다 나왔다고 보고 투자를 결정한 국부펀드 입장에선 기가 막힐 노릇이다.


최근 유럽계 은행인 크레디트스위스 지분을 사들인 카타르투자청(QIA)이 대표적이다. 셰이크 하마드 카타르 총리 겸 QIA 최고경영자는 17일 블룸버그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지분율을 밝힐 순 없지만 이 은행에 계속 투자하고 있다”며 “내년까지 150억 달러를 미국·유럽 금융사에 투자할 것”이라고 말했다. 불과 이틀 뒤 크레디트스위스는 28억5000만 달러를 추가 상각했다. 주가는 하루 만에 8% 가까이 급락했다.

크레디트스위스가 추가 손실을 공개하기 얼마 전 프랑스 2위 은행 소시에테 제네랄은 직원 한 명이 일으킨 금융사고로 72억 달러를 날렸다고 공표했다. FT는 “크레디트스위스의 부실 발견은 소시에테 제네랄 사태 이후 내부 감사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것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다른 은행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이 없다는 얘기다.

FT에 따르면 미국·유럽 금융사에 투자한 중동 국부펀드들은 지금까지 10% 정도의 평가손실을 봤다. 씨티그룹에 75억 달러를 투자한 아부다비투자청(ADIA)의 지분은 현재 가치가 60억 달러 정도다. 메릴린치에 투자한 쿠웨이트투자청(KIA)도 8%의 손실을 기록 중이다. FT는 “석유재벌 록펠러는 ‘거리에 피가 철철 넘칠 때가 바로 돈을 벌 때’라는 말을 종종 했다”며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서구 금융사들이 지금까지 충분히 피를 흘렸는지는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결국 국부펀드도 투자 적기를 골라내는 데 있어 일반인들보다 그리 똑똑하지 못했던 셈”이라고 덧붙였다.

◇한국 돈은 어떻게 되나=글로벌 금융회사들의 부실이 속속 드러나면서 한국투자공사(KIC)의 메릴린치 투자에 대해서도 우려 섞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KIC 측은 “매년 9%의 배당을 받기 때문에 현재로선 채권에 가깝다”는 입장이다. 경영기획팀 박종인 부장은 “이번에 인수한 메릴린치 우선주는 2년9개월 뒤에 보통주로 전환된다”고 강조했다. 전환 때까지 시간이 많은 만큼 당장 유불리를 논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의 견해는 갈린다. 한국개발연구원 임경묵 연구위원은 “자금 여력이 있고 시장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앞으로 이 분야에 더 투자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비해 한국투자증권 전민규 수석연구원은 “투자 시점이 너무 일렀다는 주장에 동의한다”며 “올 3분기부터 상황이 나아질 것이란 믿음이 깨질 경우 또 한번 주가가 급락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전 연구원은 “또 한번 매물이 쏟아질 때까지 기다려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선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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