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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공연장 순례] 파르마 테아트로 레지오

중앙일보

입력

밀라노에서 기차로 1시간 30분이면 도착하는 파르마(Parma). 햄(프로슈토)과 치즈(파르미자노 레자노)로 유명한 이탈리아 중북부 도시다. 유럽식품안전청(EFSA)본부가 있고 바릴라, 파르말라트 등 다국적 식품회사의 본사가 있는 곳이다. 인구 17만 7000명의 소도시이지만 이탈리아에서 손꼽히는 ‘예술의 도시’다. 이탈리아에서 밀라노 다음으로 높은 소득 수준을 자랑하며 ‘삶의 질’에서는 이탈리아 최고로 손꼽힌다. 자전거 한 대만 있으면 시내 곳곳을 누빌 수 있는 무공해 친환경 도시다. 여기에 밀라노ㆍ나폴리ㆍ베네치아에 못지 않는 전통을 자랑하는 오페라극장이 삶의 질 향상에 적잖은 기여를 하고 있다.

파르마는 베르디와 토스카니니의 고향이다. 평화의 광장에는 베르디 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며 시립공원묘지에는 파가니니가 묻혀 있다. 설탕 공장을 개조해 만든 음악당은 ‘파가니니 음악당’으로 명명됐다. 파르마 음악원은 베르디의 단골 대본 작가였던 아고리고 보이토의 이름을 따 명명됐다. 소프라노 레나타 테발디, ‘아이다’의 초연을 지휘했던 지휘자 조반니 보테시니도 파르마 출신이다.

목조로 된 파르네제 극장, 두칼레 극장이 전신

1604년 파르마 공작 파르네제 라눈치오 1세는 피렌체에서 페리의‘다프네’를 관람했다. 1598년에 초연된 최초의 오페라다. 눈부신 무대 효과에 감명을 받은 라눈치오 1세는 외국서 오는 귀빈들 앞에서 이와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는 극장을 짓기로 결심했다. 그는 조반니 바티스타 알레오티(Giovanni Battista Aleotti)에게 명하여 당대 최고의 건축가들을 불러모았다.

1617년부터 2년에 걸쳐 필로타 궁전(Palazzo della Pilotta)의 2층에 있는 병기고를 개조해 만든 목조 극장이 ‘파르네제 극장’(Teatro Farnese)이다. 개관 당시 유럽 최대 규모의 실내 극장(4000석)이었다. 극장은 순식간에 완공됐지만 개관 공연은 메디치 대공 코지모 2세의 방문 때까지 미뤄졌다. 대공은 밀라노에 있는 산 카를로의 묘소에 참배하러 가는 길에 파르마를 잠시 방문할 예정이었지만 외교적인 이유 때문에 방문을 취소했다. 그후 극장은 10년간 개점 휴업 상태로 있다가 1628년 12월 21 일 오도아르도 파르네제와 마르게리타 데 메디치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작곡된 페리와 몬테베르디의 ‘Mercurio e Marte’의 초연으로 개막공연을 치렀다.

마상 무술시합까지 곁들여진 이 공연은 엄청난 난파선 장면으로 막을 내렸다. 피날레 장면에서는 1층 바닥은 무대 뒤의 물탱크에서 퍼낸 물로 완전히 물바다가 되었다. 관객들은 마루바닥이 물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내려앉을까봐 겁을 먹고 벌벌 떨었다. 극장에서 공연이 열린 것은 단 아홉 차례. 주로 외국서 오는 왕족을 영접하거나 궁정 결혼식 때만 공연이 열렸다. 궁정 결혼식 가운데 세 차례는 파르네제 라눈치오 2세의 결혼식이었다. 처음엔 사보이 공국의 마르게리타 비올란테 공주, 그 다음엔 에스테 공국의 이사벨라 공주, 마지막으로 이사벨라가 죽고 나서 이사벨라의 여동생 마리아 공주와 결혼식을 올렸다. 이곳에서는 음악극, 연극, 발레 등의 공연이 상연됐다.

라눈치오 2세의 첫 결혼식 때는 마넬리의 ‘La Filo’가 상연됐다. 오도아르도 파르네제가 도로테아 소피아 공주와 결혼할 때는 사바디니(Sabadini)의 ‘Il Favore degli dei’가 상연됐다. 1732년 10월 파르마를 방문한 스페인 왕자 돈 카를로를 환영하기 위해 상연된 ‘Venuta di Ascanio in Italia’가 마지막으로 상연된 작품이다. 그후 파르네제 극장은 서서히 낡기 시작했다. 그후 파르네제 극장은 서서히 낡아져갔다. 1944년 5월 13일 연합군의 폭격으로 몹시 망가졌다. 12년 후에야 극장은 원래의 설계도에 따라 재건축됐다. 오늘날 이 극장은 16세기 절대왕조 시대의 극장의 모델로 유명하다. 재개관과 함께 이 극장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베르디 음악을 위한 전당으로 쓰자는 의견이 가장 많은 지지를 얻었다. 바그너의 메카인 바이로이트나 모차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처럼 파르마를 베르디의 메카로 만들자는 것이다. 극장 재개관 공연 때도 베르디의 ‘레퀴엠’을 연주하자고 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지휘봉을 잡고 카를로 베르곤치, 피오렌자 코소토 등 유명 성악가들이 출연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여러가지 난관에 부닥쳐 재개관 공연은 예정대로 치러지지 못했다.

결국 2001년에 베르디 페스티벌의 일부 공연을 유치하는 것으로 그치고 말았다. 이 페스티벌은 베르디 탄생 100주년부터 시작된 오페라 축제다. 그후 파르네제 극장은 ‘템페스트’등의 작품으로 셰익스피어 프로젝트를 무대에 올렸다.

필로타 궁정의 2층에 자리잡은 파르네제 극장은 목재와 종이 반죽, 색칠한 회반죽으로 지어졌다. 규모는 엄청난 크기다. 리오넬로 스파다(Lionello Spada)가 인테리어 장식을 맡고 루카 레티(Luca Reti)가 만든 조각품이 극장 곳곳을 수놓고 있다. 파르네제 극장은 겉을 대리석과 금으로 꾸민 것처럼 칠했다. 부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서다. 2층 객석의 중앙에는 왕족을 위한 박스석이 있는데 오페라 극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로열 박스의 전신인 셈이다. 운동장 같은 반타원형의 객석 배치로 스탠드석은 14열로 돼 있다. 객석은 모두 3000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무대는 이탈리아 최초의 이동식 무대다.

라눈치오 1세는 1685년 Teatro del Collegio dei Nobili도 지었다. 라눈치오 2세는 파르마에 극장을 세 개나 지었다. 하나는 Teatro della Roccheta. 1674년에 개관한 것으로 85개의 박스석이 있었다. 두번째는 Teatrino di Corte. 1689년 개관해 1832년 소실됐다. 스테파노 롤리(Stefano Lolli)의 작품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테아트로 두칼레(Teatro Ducale)다. 원래 리제르바 궁정이 있던 자리에 들어섰다. 스테파노 롤리가 설계한 목조 극장이다. 1689년 잔네티의 ‘Teseo in Atene’로 문을 열었다. 전성기 때는 이탈리아는 물론 유럽 전역에서도 알아주는 극장이었다. ‘마님이 된 하녀’‘La Locanda dei vagabondi’, 파이지엘로의 ‘세비야의 이발사’가 상연됐다. 로시니의 작품이 처음 소개된 것은 1814년. 까다롭기로 소문난 파르마 청중들도 ‘탄크레디’‘신데렐라’등의 작품에는 열렬한 박수갈채를 보냈다. 하지만 ‘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인’‘이탈리아의 터키인’등은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세계에서 가장 까다로운 관객

두칼레 극장의 관객은 수준 이하의 작품이나 연주에 대해서는 서슴없이 반감을 드러내는 행동을 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1816년 페데리치의 ‘자이라(Zaira)’에서부터 시작된 관습이다. 당시 관객들은 알베리코 쿠리오니의 노래가 끝나자 휘파람을 불면서 야유를 퍼부었다. 당황한 극장 측은 공연 도중 막을 내리고 발레 공연으로 대신했다. 하지만 발레가 끝났는 데도 야유는 그칠 줄 몰랐다. 결국 쿠리오니가 무대로 다시 나와서 사과했고, 오페라는 그가 중단한 곳에서부터 다시 시작됐다.

쿠리오니는 마지막 연주 때 관객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했다. 자기가 야유를 받았던 대목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말고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객석에서 일대 소동이 벌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극장에 경찰이 갑자기 들이닥쳤다. 쿠리오니는 폭동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혐의로 체포돼 8일간 유치장에 감금됐다가 파르마에서 영원히 추방됐다.

2년 후에는 개막 공연에서 실망을 안겨준 임프레사리오(흥행업자)가 투옥되기도 했다. ‘공공의 감수성에 손상을 입혔다’는 이유에서다. 두칼레 극장은 1828년 ‘젤미라’공연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고 이듬해 새 극장 개관과 함께 파괴됐다. 현재 이 자리엔 우체국과 문학협회가 들어섰다.

비좁고 작은 두칼레 극장 대신에 문을 연 ‘누오보 테아트로 두칼레’는 이탈리아 통일 직후인 1849년부터 테아트로 레지오(왕립극장)으로 불리고 있다.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을 모델로 지었다. 나폴레옹의 두번째 첩이자 오스트리아 여제 겸 파르마 대공인 마리 루이즈가 신축한 것이다. 산 알렛산드로 수도원 자리에 들어선 이 극장은 니콜라 베톨리(Niccola Bettoli)가 설계를, 지안 바티스타 보르게시, 파올로 토스키가 인테리어 장식을 맡았다. 알렛산드로 수도원은 1811년 나폴레옹의 명령으로 문을 닫았다. 공사는 8년 걸렸다. 벨리니의 ‘자이라(Zaira)’초연과 함께 1829년 5월 16일 문을 열었다. 당시 모데나 공작 프란체스코 4세와 사르데냐 출신의 그의 아내 베아트리체 비토리아도 참석했다.

개관 공연에서 초연된 ‘자이라’에 대해 관객들은 못마땅한 반응을 보였다. 로시니에게 작품 위촉을 했지만 바빠서 거절했다. 그러자 극장 측은 벨리니에게 부탁했다. 벨리니는 작품 위촉은 받아들였지만 극장 운영진 가운데 한 명이 쓴 대본을 사용할 수 없다고 거부했다. 시간이 촉박하다 보니 음악도 그 전에 썼던 작품에서 여기저기 짜깁기한 부분이 많았다. 이런 저런 일이 겹쳐서 개막 공연은 어수선하게 이뤄졌다.

1829년 첫 시즌에는 개막 공연을 제외하면 모두 로시니의 작품으로 꾸몄다. ‘모세와 파라오’‘세미라미데의 죽음’‘세비야의 이발사’등은 모두 대성공을 거뒀다.

매년 베르디 페스티벌 개최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설계된 극장은 1853년 부르봉 왕가의 카를로 3세의 명으로 네오 바로크 양식으로 화려하게 꾸며졌다. 무대에 전기 조명이 도입된 것은 1907년. 극장의 나머지 부분에도 전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베르디 탄생 100주년 때다. 1907년에 오케스트라 피트가 만들어졌고 1925년에 다시 고쳐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극장은 다행히 제1, 2차 세계대전 때 폭격을 받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 기차역 부근만 파괴되었을 뿐 파르마 도심은 거의 그대로 보존됐다. 하지만 1983년 11월 지진으로 극장이 문을 닫았고 1985년 1월 8일 ‘포스카리가의 두 사람’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1853년 객석은 신고전주의 양식에서 네오바로크 양식으로 더욱 화려하게 꾸몄다. 최근 리노베이션을 거쳐 객석 의자 아래에서 찬바람이 나오도록 에어컨 시설을 갖췄다

객석 천장에는 리노(고대 음악의 아버지), 아리스토파네스(그리스 희극), 유리피데스(그리스 비극극), 팔라우토(라틴 희극), 세네카(라틴 비극), 시인 타스타시오, 알피에리, 골도니 등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로비에도 이오니아 양식의 대형 기둥이 지붕을 떠받치고 있다. 로비 천장과 벽면은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꾸몄다.

‘지혜의 신의 승리’라는 제목의 무대막은 14×10.5㎡ 크기의 조반니 바티스타 보르게시(1790∼1846)의 작품이다. 보르게시는 객석 천장 벽화도 그렸다. 무게 1.1t짜리 샹들리에는 오귀스트 라스리에르(Auguste Lacerriere)의 파리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것이다. 촛불, 개스등을 거쳐 1890년부터 전기등을 사용하고 있다. 회반죽과 금빛의 실내 장식은 1853년 기롤라모 마냐니의 작품이다. 무대의 장식틀 중앙에 있는 시계 주변에는 유명 시인과 작곡가의 흉상으로 꾸며져 있다.

테아트로 레지오는 1843년 ‘나부코’를 시작으로 베르디의 작품이 모두 상연된 것으로 유명하다. 1913년 베르디 탄생 100주년에는 ‘오베르토’‘나부코’‘가면무도회’‘아이다’‘팔슈타프’‘돈카를로’‘레퀴엠’등 베르디 작품만 상연됐다. 베르디 서거 50주기(1951년)에는 ‘에르나니’‘돈카를로’‘레냐노의 전투’‘팔슈타프’가 상연됐다. 1829년부터 1971년까지 가장 많이 상연된 작품은 단연 베르디였다. 도니제티, 벨리니가 그 뒤를 이었다. 베르디 작품으로는 ‘아이다’(189회), ‘일 트로바토레’(177회), ‘리골레토’(164회), ‘에르나니’(102회), ‘라 트라비아타’(92회) 순으로 자주 상연됐다. 도니제티 작품으로는 ‘람메르무어의 루치아’(122회), ‘라 파보리타’(90회)가 자주 공연됐다. 벨리니 작품 가운데는 ‘노르마’(110회)‘몽유병의 여인’(99회)이 상위권에 올랐다.

2001년 베르디 서거 100주기에는 1년 내내 베르디 작품이 상연됐다. 2003년부터는 베르디 생일인 10월 10일부터 시대 순으로 베르디 오페라 전곡을 상연 중이다. 2003년 ‘오베르토’를 시작으로 2008년 ‘팔슈타프’까지 모두 27개의 작품이 차례로 무대에 오른다. 파르마 극장의 시즌은 매년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시즌마다 4개의 작품이 상연된다. 5∼6월엔 베르디 오페라 2편을 5∼6회씩 상연하는 ‘베르디 페스티벌’이 열린다.

파르마는 오페라 관객이 까다롭기로 악명이 높은 도시다. 오페라 가수들이 세계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관객들이다. 관객 대부분이 거의 전문가 수준의 귀를 소유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오페라 전곡을 음표 하나도 빼놓지 않고 줄줄 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loggionisti’라고 불리는 이들은 주로 발코니석에 자리를 잡고 관객의 반응을 주도해간다. 작품이나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연주 도중에도 야유와 휘파람이 터져 나오기 일쑤다. 작품이나 연주가 터무니 없이 형편 없으면 공연을 계속할 수 없도록 ‘폭동’에 가까운 반응을 보인다. 공연 도중 막을 내리고 티켓을 환불해주는 경우도 많았다. 심지어는 관객의 반응에 따라 이튿날 극장장이 해고되기도 했다.

1903년 폰키엘리의‘라 조콘다’공연에서 여주인공 엠마 카렐리는 2막에서 야유가 터져 나오자 겁을 먹은 나머지 무대 의상을 입은 채 분장도 지우지 않고 기차역으로 달려갔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1979년 ‘라 트라비아타’공연에서 비올레타의 노래에 실망한 데다 지휘자가 템포를 제맘대로 바꾸자 3막 직전에 야유가 터져 나와 결국 공연이 중단되기도 했다.

2001년 베르디 페스티벌에서 ‘맥베스’첫날 공연에서 맥베스 부인으로 출연할 예정이었던 티지아나 파브리치니(Tiziana Fabbricini)가 후두염 때문에 출연을 취소했다. 하지만 소문이 돌기로는 그녀가 파르마 데뷔를 앞두고 파르마 관객의 악명을 듣고 미리 겁을 먹었다는 것이다. 박수부대 사이에선 공연 몇달 전부터 이번 작품과 극장 경영진 측에 대해 반감이 싹트기 시작해 공연 첫날 폭발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괜히 희생양이 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첫날 공연 때 관객들은 조용히 넘어갔다. 이번에는 티지아나가 그녀의 박수부대를 급파해서 대타로 출연한 자신의 라이벌 데니아 마졸라(Denia Mazzola)가 공연할 때 야유를 퍼붓도록 사주했다. 마졸라가 무대로 들어서자 한쪽 발코니석에서는 바닥을 발로 구르고 소리 지르고 휘파람 불고 난리가 났다. 발코니석의 나머지 부분에서도 이에 질세라 반발했다. 노래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아비규환이 벌어졌다. 사실 파브리치니는 신문에 공연 첫날의 사태에 대해 아무런 개입을 하지 않았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오텔로’공연에서 죽을 쓰고 만 테너 가수가 이튿날 아침 기차역에 도착해보니 짐꾼이 아무도 그의 가방을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는 얘기도 있다. 아무리 슈퍼스타로 유명한 성악가라도 파르마에선 철저하게 실력으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 가수의 명성이 높을수록 파르마 관객은 더욱 까다로운 반응을 보인다. 성악적인 기교보다는 얼마나 무대와 공연에 몰입하느냐를 따진다. 그만큼 제작진이나 출연진에서는 공연에 최선을 다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객석의 상당 부분이 외국 관광객들로 가득찬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 비해 파르마 극장은 수백년째 집안 대대로 오페라 애호가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파르마 시민들의 자존심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공식 명칭: Teatro Regio di Parma
◆홈페이지: www.teatroregioparma.org
◆개관: 1829년 5월 16일
◆건축가: 니콜라 베톨리(Nicola Bettoli, 1780∼1854)
◆객석수: 1300석
◆상주단체: 베르디 오페라 페스티벌
◆무대막: G B Borghesi
◆소재: Via Garibaldi 16/A, 43100 Parma, Italia
◆전화: +39 (0)521-218-678
◆초연: 벨리니‘자이라’(1829년), 리치‘누오보 피가로’(1832년), 바티아토‘제네시’(1987년)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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