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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비서실>222.끝 YS.황태자 최후의 決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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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3당 통합 과정에서 김영삼(金泳三)민주당총재가 끝까지 고집을굽히지않은 대목은 내각제 문제였다.YS가 3당 통합으로 여권에뛰어든 이후 겪은 굵직한 갈등의 고비마다 불거져 나오는 문제 역시 내각제 개헌이었다.
내각제가 문제거리였던 이유의 핵심은 서로에 대한 불신과 의심이었다.그래서 내각제는 협상과정에서부터 걸림돌이 되었다.통합의청와대 밀사 박철언(朴哲彦)의원이 황병태(黃秉泰)의원과 협상하다가 막바지에『일손이 더 필요하다』며 YS에게 통합실무대표를 한사람 더 지정해달라고 한 것도 사실은 이같은 내각제를 둘러싼의심 때문이었다.
박철언의원은『처음에는 민주당쪽에서도 내각제개헌을 한다는 원칙에 별 이견이 없었습니다.그런데 나중에는 자꾸 발을 빼려는 인상이더라구요.그래서 내각제개헌약속을 확실히 하기위해 문서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아무래도 황병태의원만 서명한 문서로는 구속력이 약하다고 생각했습니다.그래서 보다 확실히 YS의 뜻이라고 인정될수 있는 가신(家臣)의 사인이 필요하다고 봤습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먼저 노태우(盧泰愚)대통령에게 얘기해 민정당쪽에서 박준병(朴俊炳)의원을 합류시키기로 했다.이어 YS를 찾아가「제일 믿을만한 한사람을 더 골라주십시오」라며 YS의 분신을 요구했다.YS는 즉석에서 김덕룡(金德龍)의원을 추 천했다.그렇게 해서 YS의 심복 김덕룡의원을 끌어들인 박철언 보좌관은 내각제 개헌의 문서화를 요구했다.그의 증언에 따르면『예상했던대로내각제각서를 쓰자고하니 쭈뼛쭈뼛하더군요.「내각제는 3당 합당의대전제」라며 여러차례 주장했습니다.
그러니까「YS와 상의해보겠다」더니만 얼마뒤 서명에 동의하더군요』라고 기억했다.
공화당쪽 합당밀사인 김용환(金龍煥)의원은『내각제 각서를 꺼리던 YS를 설득한 사람은 JP』라고 주장했다.그의 주장에 따르면 합당의 마지막 절차로 YS가 청와대에서 盧대통령과 만나고 나온 90년1월12일 밤 음식점에서 YS와 비밀회 동한 JP는「내각제부분을 확실히 하지않으면 모든 것을 없던 것으로 하겠다」며 확실한 태도 표명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 민정당대표와 민주당대표가 각서에 서명한 곳은 1월18일 호텔신라였다.
그러면 내각제각서를 꺼려한 YS의 본심은 어떠했는가.YS는 회고록에서『민정당측의 내각제 개헌요구를 보고받고 일리있는 견해라고 생각했다.내각제도 대통령제 못지않게 훌륭하다고 믿고있었다.그럼에도 나는 신중한 자세를 취할수밖에 없었다』 고 밝혔다.
신중해야할 이유 역시 오랜 정치경험에서 나온 것이었다.개헌을무리하게 추진하다 무너진 자유당정권이나,무리한 개헌으로 독재의길로 들어섰다가 비참한 최후를 마친 박정희(朴正熙)정권을 지켜본 경험이다.결국 개헌은 야당,보다 구체적으로 DJ의 양해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이다.그래서 YS는 밀사들에게『내각제 개헌이 합당을 위해 불가피하면 저쪽과 얘기를 진행시켜보시오』라면서도『그러나 내각제문제를 전면에 내세우면 정치적 음모와 야합이란인상을 주어 안된다』고 지시했다 고 기억했다.
YS는 실제로 내각제개헌의 뜻이 있었지만 각서가 나중에 문제가 될수 있다는 생각에서 쓰기를 망설였다는 것이다.한편 민정당.공화당쪽은 YS의 말을 믿지못해 문서화를 요구했고,결국 YS는 내키지않은 각서에 밀사들이「김영삼 총재를 대신 하여」라는 수식을 단채 사인하는 것을 허락한 것이다.
이렇게 말썽의 소지를 안은채 합당이 선언됐기에 내각제문제는 정식 합당절차인 90년 5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한차례 소용돌이를 몰고왔다.소용돌이의 진원은 6共 황태자 박철언 정무장관과 새로운 권력자로 입성한 YS 사이였다.
박철언前의원의 기억에 따르면 합당 1개월 남짓 지난때였다고 한다.朴장관은 YS로부터 부름을 받았다.YS는 반갑게 맞이한뒤포도주를 내왔다.
YS는『朴장관,우리현실에 내각제는 맞지않아.그거 없던 일로 합시다』라며 내각제무효화를 설득하기 시작했다고 한다.YS는『나하고 朴장관 당신,그리고 盧대통령 3명이 힘을 합하면 못할 일이 뭐 있겠소.朴장관이 지난 대선때 盧대통령 밀어 준 것처럼 확실하게 날 밀면 내가 당선될 것이고,당선되면 5년밖에 더 하겠나.그러고나면 내가 다음에는 당신을 도와주겠다』며「차기」까지은근히 언급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朴장관은『내각제는 해야합니다』라며 오히려 YS를 설득하려했다.당연히 YS의 표정이 어두워졌다.한참만에 입을 뗀 YS는 『朴장관,신중하게 한번 재고해보시오』라는 말만 남겼다고한다. 박철언前의원은『이미 이때 YS와 나는 결정적으로 결별한셈이죠.소련방문때「수행」이니「동행」이니 하며 갈등을 일으킨 것도 이날 내각제를 둘러싼 이견으로 서로 돌아섰기 때문입니다』고말했다. 이무렵 YS캠프에서 내각제개헌을 무효화하기로 결정한 것은 사실이다.역시 의심에서 비롯된 갈등의 시작이었다.민주당관계자 Q씨는『합당을 선언한뒤부터 민주당사람들 사이에「뭔가 이상하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통합추진위원회 회의를 해보니까 모든게 민정당의 틀을 유지한 가운데 민주.공화당을 흡수한다는 식이에요.YS를 민정당 시절의 얼굴마담용 대표정도로 밖에 생각하지않는 겁니다.민정계 일부에서 노골적으로「YS도 이제 끝이다」는 얘기를 하는데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죠』라고 기억했다.그래서 민주당사람들이 나름대로 분석해보니 결론은「박철언구상=YS고사작전」이었다.전략적 고리는 내각제였다.당연히 배격해야할 음모로 단정했다.
이러한 심증은 여러가지 방증으로 굳어져갔다.당시 관계자 Z씨는 『박철언장관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사람이 식사에 초대해 갔더니「차기대권은 朴장관」이라는 식으로 얘길하더군요.그앞에서는 아무 얘기 않았지만 끝나고 나오면서 다들「차차기면 몰라도,차기는너무 심한거 아냐」라고들 말했죠.그 얘기가 YS귀에 안들어갔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박철언장관 본인도 YS쪽을 자극하는 말을 시작했다.朴장관은『권력에 대한 묵계는 없다.YS의 위상은 그가 어느 정도의 능력을 보여주느냐에 달렸다』는 말로 「YS의 위상」을 흔들었다.
소련방문을 앞둔 3월초에는『정부각료(朴장관 본인)가 정당대표(YS)의 외국방문을 수행한다는 표현은 적절치않다』고 말해「수행」이냐「동행」이냐는 논쟁과 파문을 낳았다.
이후 갈등은 서로 물러설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YS는 4월3일 진천-음성 보궐선거의 패배를 공작정치탓으로 돌리면서 주역을 박철언장관으로 지목했다.
박철언장관 역시 가만히 있지않았다.4월10일 양재동자택을 찾아온 기자들에게『내가 입을 열면 YS의 정치생명도 하루 아침에끝장』이라는 폭탄발언을 하고 만다.
YS는 다음날인 11일 부산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내가 근절을 주장해온 공작정치가 나에게 행해지고 있다.공작정치의 뿌리를뽑겠다』고 선언했다.
결국 盧대통령은 박철언장관을 불러『말썽부리지말고 밖에 나가 있어라』며「근신 외유」를 지시했다.
그리고 13일 朴장관을 사퇴시키고 후임에 親YS의 선봉격인 김윤환(金潤煥)의원을 임명했다.내각제를 둘러싼 YS와 박철언간의 첫싸움은 대권가도의 결정적인 고비였다.권력주변들이 YS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힘의 이동을 알아채고 YS쪽으로 몰려가기 시작했다는 얘기다.일명「월상(越上:YS의 집이 있는 상도동쪽으로넘어갔다는 뜻)派」의 등장이다.
5월10일 합당전당대회에서 YS는 최고대표위원으로 여권 2인자의 자리에 올랐으며,같은 시간 박철언의원은 이역만리 이집트 나일강변을 걷고 있었다.
〈吳炳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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