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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동맹 재건축할 시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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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예를 들어, 일본이 최신예 전투기인 F-22를 미국으로부터 도입하게 된다면 이론상 한국도 의지와 여건이 뒷받침되는 한 동일한 수준의 기종을 구매할 수 있다. ‘글로벌 호크’ 등 한국의 첨단 군사력 건설에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무기체계의 구매 역시 보다 원활해질 것이며, 행정비용의 절감, 절차 간소화, 심의기간 단축 역시 기대할 수 있다.

물론 법안 제출 자체가 곧 한국의 지위 격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 8월에도 유사한 내용의 법안이 미 상원에 제출되었으나 아직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이번 미 의회 내의 움직임은 그동안 미국 측에 대해 FMS 지위 향상을 꾸준히 요구해 온 우리의 지속적인 노력의 결실이지 특정 시기의 한·미 관계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는 분석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새 정부 출범을 앞둔 시기에 미국이 기존 관계의 변화를 꾀하는 조치를 모색하고 있다는 사실이 평가절하돼서는 안 될 것이다.

무기는 일반 상품과 달리 지불 능력이 있다고 해서 아무나 구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 국가가 다른 국가에 대해 무기를 판매하는 행위는 구매국이 자신들의 협력대상국이거나 최소한 적대국이 아니라는 신뢰가 있을 때에 비로소 가능하다. 그 무기와 관련 기술이 판매국이 아끼는 첨단의 것일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미국이 한국에 대해 FMS 등급 상향을 현실화한다면 이는 미국이 차지하는 동맹 네트워크 내에서 한국의 위상이 그만큼 강화되며, 한·미 동맹의 역할에 대한 미국의 기대가 그만큼 증대되었음을 의미한다.

지난 5년여 동안 한·미 동맹은 외형적 표정관리의 이면에 적지않은 신뢰의 위기를 경험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미국 내 주요한 여론 주도층인 의회 차원에서 한국의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FMS 등급 격상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새로운 신뢰의 축적을 향한 시작이라고 보아야 한다. 다만 지난 10여 년 동안 진행돼 온 동맹 환경의 변화를 감안할 때, 한·미 동맹은 과거로의 회귀인 ‘복원’보다는 미래로의 동반을 위해 ‘재건축’돼야 한다.

동맹관계의 재건축은 신뢰의 회복 차원에서 미래를 향한 약속, 즉 공통 비전의 제시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임기를 1년 남겨둔 부시 행정부와의 비전 협의가 과연 새 정부가 지향하는 실용성과 부합할까를 고민하지는 말자. 실용과 얄팍한 계산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현재의 미국 대외정책은 거대한 흐름이지 특정 행정부의 전유물이 아니다.

 비전은 장황하고 구체적일 필요가 없다. 한·미가 변환의 시대에서도 여전히 같은 길을 갈 것이며, 지리적 관념이나 단순 군사협력을 넘어선 ‘공통의 가치’에 대한 위협을 함께 헤쳐나갈 것이라는 뜻을 보여주면 충분하다.

따라서 점차 고조되고 있는 한·미 간 신뢰 증진의 모멘텀을 그대로 살려 2008년 중 한·미 정상 간 동맹 비전에 대한 선언을 통해 상호신뢰를 굳건히 하고, 2009년 출범할 새로운 미국 행정부와 동맹 운영의 구체적 지침을 마련하는 2단계 접근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젠 공통 가치에 입각해 상호 간 기여와 이익의 형평성을 이루는 새로운 동맹체제를 정립할 시기와 여건이 조성됐다.

차두현 한국국방연구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