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간판은 거리의 '표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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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최근 중앙일보에 4회에 걸쳐 연재된 '아름다운 간판'시리즈 기획기사는 비록 만시지감(晩時之感)이 없진 않았지만 '늦은 것을 안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말처럼 적절한 문제제기였다. 그동안 꾸준히 논란이 일었던 도시미관, 더 나아가 한국인의 미학적 정체성을 대내외적으로 드러내는 척도라 할 간판(사인보드)의 후진성을 현실적으로 업그레이드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하는 것은 물론 시각문화의 현주소를 가늠하게 하는 시금석이 되기에 충분했다.

간판이란 특정지역의 문화적 정서와 미적 수준을 반영하는 시각환경의 기초단위로서 손색이 없는 '환경미화의 첨병'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각(視覺)문화'란 개념은 쉽게 말해 사람이 눈뜨고 빈번히 접할 수 있는 주변환경에서 비롯되는 온갖 과정과 결과물의 총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에서 자의건 타의건, 좋든 싫든 자주 마주칠 수밖에 없는 간판은 시각환경에서 중차대한 기초세포일 수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이번 기회에 몇 가지 관점을 제시하고 싶다.

우선 한국의 간판은 한마디로 무표정한 것이 대부분이다. 바꿔 말해 '그 얼굴이 그 얼굴'이라는 식으로 특유의 개성이 없어 음식점이나 문방구나 골동품점이나 그저 그런 식의 문자체나 색채 일색이다.

둘째로, 간판들의 표정이 어둡고 획일적이다. 이렇게 된 근본 원인은 정서의 경직성에서 비롯되는 듯하다. 요즘엔 문자체나 색상이 다양하게 개발돼 보급됨으로써 발전적 변화의 조짐도 보이고는 있으나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셋째로, 적.청.황색 등 원색의 남용과 오용 문제다. 그간 한국의 간판 상황은 시각적으로 '적색 공화국'이라거나 '시각공해의 바다'라는 비아냥이 늘 따라다닐 정도였다. 쉽게 눈에 띈다고 붉은 색을 너나 할 것 없이 마구 사용한 탓으로 상가거리는 벌겋게 불타올랐고 그 결과 모두 눈에 띄지 않는 '공멸'의 역설(逆說) 속에 갇히고 말았다. 게다가 색채를 잘못 쓰는 문제도 심각해 몰(沒)개성한 간판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해 시각공해를 부채질했다.

결론적으로 간판은 시각적 삶의 질을 높이는 기본적 '키워드'이고 도시의 '표정'을 불어 넣는 출발점이다. 또한 깊이 유념해야 할 점은 '나만 튀지 말고 너와 나 같이 어울려 튀자'는 취지의 성숙된 간판문화가 정착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자율적인 도덕성과 미학성이 동시에 전제돼야 난잡하고 무표정한 도시환경을 다소나마 극복할 수 있다.

시각공해시대에 완전히 면역이 돼 아름답고, 아름답지 못한 것을 구분하지도 못할 정도에 이르기 전에 이를 시정, 개선하려는 노력이 시급하다. 일찍이 독일의 대문호인 괴테는 '듣기 싫은 것은 참을 수 있어도 보기 싫은 것은 참기 어렵다'며 인간 시각의 중요성을 삶의 질과 연계시키지 않았던가.

간판의 크기.위치 등의 강력한 법적 규제도 중요하지만 이보다 더욱 근본적인 것은 국민의 미적.정서적 수준을 높이고 지역특성에 걸맞게 전통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부단히 연구하는 일이다.

임기응변식의 대증요법인 법적 규제보다는 국민의 자발성과 미적 자각이 거시적 안목에서 요구된다. 아울러 각 지방자치단체의 홍보와 각종 지원도 병행돼야만 거리 환경정리에 실효를 거둘 수 있음은 물론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간판은 거리의 '표정' 그 자체다. 표정(表情)의 한자 풀이는 옷을 입고 겉으로 나타나는(表) 마음(心)의 맑은(靑) 정도가 될 것이다. 거리의 간판에도 이처럼 인간의 마음을 부여해야만 진실로 '아름다운 간판'이 될 것이다.

유한태 숙명여대 산업디자인 연구소장

*** [바로잡습니다] 3월 4일자 30면 기사중

3월 4일자 30면 '간판은 거리의 표정' 제하의 기사 중 '남만 튀지 말고 너와 나 같이 어울려 튀자'는 '나만 튀지 말고…'의 잘못이므로 바로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