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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미국대선] 민주 후보 된 케리의 삶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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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젊은 케리가 60년대 베트남전에서 세운 공으로 훈장을 받고 있다. [AP=연합]

1971년 4월 미 상원 외교위 청문회는 월남전에서 갓 돌아온 한 젊은 해군장교의 증언으로 발칵 뒤집혔다. "무슨 권리로 정당하지 않은 전쟁에서 젊은이들에게 죽음을 강요할 수 있느냐"고 했던 그의 절규는 반전운동 그룹의 유명한 구호가 됐다. 증언대에 선 존 케리 중위가 예일대 출신 엘리트이면서도 자원입대했고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전우들을 구해내 여러 훈장을 받은 전쟁 영웅이라는 사실은 미 국민에겐 커다란 충격이었다.

전쟁 영웅 케리는 그 뒤 철저한 반전운동가로 변했다. 다른 전우들과 함께 자신이 받은 훈장들을 의사당 계단에 집어던지고, 워싱턴 반전 집회의 단골 연사로 등장했다.

메콩강서 겪은 삶과 죽음의 경험은 유복한 외교관의 자녀로 태어나 엘리트 코스를 밟던 청년 케리의 삶을 바꿔놓은 것이다.

케리는 그해 29세 나이에 매사추세츠 제5선거구 하원의원에 출마했다 낙선했다.

변호사로 변신한 뒤에도 정치의 꿈을 접지 않았고 결국 83년 매사추세츠주 부주지사로 선출됐다. 케리는 85년 민주당 상원의원이 됐다.

당선 첫해 그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이란에 무기를 판 돈으로 니카라과의 콘트라 반군을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헤쳤다. 파나마의 독재자 노리에가가 마약 밀매 자금을 미국 은행을 통해 돈세탁하고 있다는 것도 밝혀냈다.

4선 상원 활동 동안 '베트남'은 항상 중심테마였다. 베트남을 17번 방문, "베트남에 생존해 있는 미군은 더 이상 없다"는 사실을 최종 확인했고, 빌 클린턴 행정부가 베트남과 국교를 정상화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2000년 공화당 경선에서 베트남전 포로 출신인 존 매케인 상원의원에 대해 경쟁자인 부시 캠프에서 "참전 군인들을 등한시했다"고 비난하자 매케인 지지 서명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2000년 대선에서 민주당 앨 고어 후보가 패하지 않았다면 그는 진보적 상원의원으로 그대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케리는 "나는 고어가 우리 세대의 대표가 될 것으로 생각했고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려고 열심히 뛰었다"며 아쉬워했었다. 그런데 고어가 득표는 더 많이 하고도 선거인단 제도 때문에 조지 W 부시에 패하자 출마를 결심했다는 것이다. 그는 1988년 이혼하고 다섯살 연상의 테레사 하인즈와 95년 재혼했다.

테레사는 공화당 상원의원이었던 남편 존 하인즈와 사별하면서 식품재벌 하인즈사의 상속인이 됐다. 케리는 전처 소생의 두 딸을, 테레사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난 세 아들을 데리고 결합했다. 케리의 유세장에선 독특한 광경을 볼 수 있다. 딸과 의붓아들들이 케리를 응원하고 지지연설을 한다.

케리는 부인에게 공개적인 애정표현도 서슴지 않는다. 약점이 될 수도 있는 가족사를 장점으로 돌려놓은 것이다. 케리는 역전의 명수라고도 불린다. 96년 인기 절정이던 매사추세츠 주지사 윌리엄 웰드가 상원의원에 도전했을 때 그는 초반 부진을 딛고 역전극을 일궈냈다.

이번 경선에서도 케리는 하워드 딘의 초반 돌풍에 눌리는 듯했지만 결국 승리를 낚아챘다.

1m90㎝의 큰 키에 얼굴은 주름 투성이인 케리는 연설할 때 결코 서둘지 않는다. 차근차근 주장을 전개하며 설득한다.지지자들이 박수칠 틈조차 없이 몰아치는 하워드 딘과는 차이가 있다.

대선에서 그가 승리하면 여러 기록이 경신된다. 60년 존 F 케네디 대통령 이후 동부출신이 승리한 적이 없다거나, 주지사나 부통령 출신이 아닌 상원의원은 대통령이 안 된다는 징크스를 깨는 것이기 때문이다.

워싱턴=김종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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