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쉽고 강렬하게 …역대 대통령 명언 자주 인용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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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 18면

그 자리가 워낙 중요한 만큼 미국 대통령의 취임사는 내용 분석(content analysis) 등 각종 기법을 동원해 분석한다. 2005년 부시의 2기 행정부가 출범할 때도 취임사가 집중 해부됐다.

2기의 화두는 ‘자유의 행진(march of freedom)’이었다. 2002년 1월 29일 연두교서에 나온 ‘악의 축(axis of evil)’이라는 표현보다 후퇴했다는 의견도 있다. 나(I·my)보다 우리(we·our)가 더 많이 사용됐다. 취임식 뒤 워싱턴 포스트는 ‘자유로운(free)’과 ‘자유(freedom·liberty)’를 49번 사용한 반면 테러, 전쟁, 이라크는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부시는 심지어 9·11 테러를 ‘불의 날(a day of fire)’이라고 우회적으로 표현해 완곡어법(euphemism)의 성향을 드러냈다.
미 대통령 취임사의 수사(修辭)를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은 취임사에 나온 쿼테이션(quotation)을 통하는 것이다.

쿼테이션은 우리말로 인용문(引用文)이다. 인용문은 “남의 말이나 글에서 직접 또는 간접으로 따온 문장”이다. 그래서 인용문은 사실상 명언·명구와 동의어다. 어떤 말이 인용되는 이유는 그만큼 사리에 맞거나 널리 알려져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인용문은 말과 글의 품격(品格)과 설득력을 높이는 효과를 낳는다. 정책 개발도 중요하지만 정책 실행은 더 중요하다. 그러려면 대(對)국민 설득력을 높여야 한다. 원대한 구상을 국민에게 납득시키고 국민의 뇌리에 각인시키려고 할 때 역대 대통령의 취임사는 인용문의 보고(寶庫)다. 훌륭한 업적을 남긴 대통령의 말을 국민이 아끼기 때문에 새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의 말들을 자신의 취임사에 인용한다. 결국 인용이 많이 되는 취임사를 한 대통령은 훌륭한 대통령이 되는 셈이다.

워싱턴 DC에 있는 링컨기념관(Lincoln Memorial)은 링컨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1922년 문을 열었으며 북쪽 벽에 링컨의 2기 취임사가 새겨져 있다. 중앙포토

미 대통령들은 업적·지도력·품성뿐만 아니라 취임사 수준으로도 평가 받는다.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위대한 대통령으로 손꼽히는 링컨의 2기 취임사는 미 역사상 최고의 연설로 평가된다. 링컨 스스로 2기 취임사가 게티즈버그 연설보다 더 낫다고 만족해했다고 한다.

링컨의 2기 취임사는 역사상 워싱턴의 2기 취임사(135개 단어),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4기 취임사(557개 단어)에 이어 세 번째로 짧은 문장(698개 단어)이다. 또한 당시로선 글을 아는 사람의 60%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가독성 높은 문장이었다. 링컨은 취임한 지 한 달여 만에 암살됐다. 이런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그 취임사는 국민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불멸의 취임사로 칭송받았다.

클린턴과 부시도 취임사에서 인용문을 자주 구사했다.
-Thomas Jefferson believed that to preserve the very foundations of our nation, we would need dramatic change from time to time. (토머스 제퍼슨은 우리나라의 기초를 보존하기 위해 가끔씩 우리에게 극적인 변화가 필요하리라고 믿었습니다.-클린턴, 93년 취임사-)

-The rulers of outlaw regimes can know that we still believe as Abraham Lincoln did: “Those who deny freedom to others deserve it not for themselves; and, under the rule of a just God, cannot long retain it.” (불법 정권의 통치자들은 우리가 에이브러햄 링컨이 믿었던 것을 지금도 믿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링컨은 말했습니다. “남에게 자유를 주지 않는 사람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없으며 정의로운 신의 통치하에서는 자유를 오래 유지할 수도 없습니다.-부시, 2005년 취임사-)
클린턴은 “정부는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며 정부 자체가 문제입니다”라는 레이건의 말을 활용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Government is not the pro-blem, and the government is not the solution. We―the American people―we are the solution. (정부가 문제가 아닙니다. 정부가 해결책이 아닙니다. 우리 미국 국민이 바로 해결책입니다.)

대통령 취임사의 수사학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은 성서 구절의 인용과 신에 대한 언급이다. 미국의 대통령 당선인은 또 취임선서에 어떤 성서 구절을 사용할 것인지 정해야 한다. 신에 대한 언급이 없는 취임사는 조지 워싱턴의 2기 취임사가 유일하다.
영어에서는 동어 반복을 꺼리기 때문에 신의 뜻을 가진 다양한 동의어가 사용된다. 취임사에도 Providence, Almighty God, Heavenly Father, Almighty Being, Divine Hand, Almighty Ruler 등 신을 지칭하는 다양한 동의어가 쓰였다.

부시는 2005년 신의 동의어로 “Author of Liberty(자유의 창시자)”라는 표현을 썼다.
-History has an ebb and flow of justice, but history also has a visible direction, set by liberty and the Author of Liberty. (역사 속에서 정의는 부침을 겪습니다. 그러나 역사에는 자유와 신이 정한 명백히 나아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God’이라는 단어를 피한 이유로 대통령이 기독교 신자라기보다 이신론자(Deist)였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제퍼슨과 링컨 등은 대선 기간 내내 반대파로부터 이단자라는 공격을 받곤 했다.

취임사는 또한 인용문의 산실(産室)이기도 하다. 오늘의 취임사가 내일의 인용문이다. 내년 1월에 취임선서를 할 제44대 미 대통령의 취임사도 틀림없이 명문일 것이다.

현대는 알기 쉬운 영어(Plain English)의 시대다. 요즘 취임사는 짧은 문장과 쉬운 단어를 선호한다. 19세기와 20세기 초반 취임사에 나오는 문장은 언제 끝날지 모를 만큼 길고, 단어들 역시 현란하다. 하나의 문장에 30~40개 단어가 동원된 적이 많다. 그러나 요즘에는 짧고 쉬워졌다. 81년 레이건의 취임사 문장을 보자. 짧고도 인상적이다.

-Let us renew our determi-nation, our courage, and our strength. (우리의 결의, 우리의 용기, 우리의 힘을 새롭게 합시다.)
-We have every right to dream heroic dreams. (우리가 영웅적인 꿈을 꾸는 것은 당연합니다.)

대통령 취임사 가운데 명문이 탄생하는 배경에는 연설문을 전담하는 스피치라이터(speechwriter)의 활약이 있다. 이들은 전문가라기보다 다방면의 지식을 갖춘 사람(generalist)이다. 다양한 분야와 계층에 대해 폭 넓은 인식을 갖고 정치·행정·언론 등의 분야에서 일한 경력이 있다. 이들이 만든 초안은 수십 차례의 보완과 수정을 거치는데 지도자 의중을 얼마나 잘 담느냐에 따라 작업이 빨리 끝날 수 있다.

이들은 최고지도자가 하고 싶은 말을 알아내 연구·조사한 뒤 정교한 논리에다 ‘양념’으로 적절한 사례·일화를 끼워 넣는다. 적절한 인용문을 찾는 것도 물론 이들의 몫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지만 미 대통령 취임사에서 변하지 않는 부분도 있다. 취임사는 헌법 수호에 대한 의지, 인류 역사에서 미국이 이룩한 성취, 임기 중의 비전과 목표를 제시한다. 취임사를 통해 미국은 4년마다 거듭 태어난다. 미국의 소프트 파워는 그럴 때마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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