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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 선정위원회’가 고른 新고전 ⑦ 옥중수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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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 23면

20세기의 마르크스주의 저작 중 아직도 가장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책은 무엇일까? 안토니오 그람시의 『옥중수고』(정확한 번역은 『옥중수고 선집』)이다. 물론 레닌의 『국가와 혁명』도 공산주의 혁명과 많은 공산주의 국가의 이념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레닌의 경우 1980년대 말 소련·동구의 몰락 후 그 영향력이 급속히 약해졌다. 하지만 그람시는 그렇지 않다. 특히 주목할 것은 그 영향력이 결코 좌파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시민사회 개념이나, 헤게모니·포드주의 같은 주류이론에서 많이 쓰는 개념을 빚지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점에서 현대 마르크스주의 저서 중 ‘최고의 고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대 마르크시즘의 ‘바이블’

1891년생으로 20세기 초반에 활동한 그람시는 이탈리아 공산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나 무솔리니의 파시즘 정권이 들어서면서 감옥에 갇히고 만다. 감옥에서 그는 왜 이탈리아의 노동자들이 공산당이 아니라 파시즘 같은 극우세력을 지지하게 됐는지를 비롯해 서구의 진보운동이 안고 있던 많은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글을 쓰다가 37년 옥사했다. 다행히 이 원고는 감옥 밖으로 반출되어 『옥중수고』라는 이름으로 48~51년에 여섯 권의 책으로 출판됐다. 이 중 중요한 것을 한 권의 책으로 간추린『옥중수고 선집(Selections from Prison Notebooks)』이 1971년 영어로 번역·소개되면서 폭발적인 영향력을 갖게 됐다.

그람시가 가진 문제의식의 핵심은 이탈리아를 비롯한 서구 사회는 낙후한 러시아와 다르며, 러시아 혁명 같은 무장봉기(기동전)와는 다른 혁명 전략(진지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같은 문제의식에서 주목한 것이 바로 시민사회다. 전통적으로 마르크스주의는 한 사회가 국가라는 상부구조와 경제라는 토대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그람시는 국가와 토대 사이에 학교·교회·언론·친목회 등 다양한 사적인 조직들의 집합체인 시민사회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느 사회건 물리력만으로 유지될 수 없고 헤게모니라고 부르는 국민 동의가 필요한 바, 경찰·군대 등 공적 조직인 국가가 공권력이라는 강제력을 담당한다면 여론과 같은 헤게모니는 주로 시민사회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봤다.

『옥중수고』 Quaderni del Carcere 안토니오 그람시, 1948~51, 거름(1999

이 같은 문제의식에 기초하여 그는 러시아와 서구의 차이를 주목했다. 러시아는 국가가 과대 성장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었던 반면 시민사회는 미성숙하고 약했다. 따라서 국가의 물리력을 기동전으로 무력화하자 그 체제는 무너졌다. 그러나 서구는 시민사회가 발달해 국가와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 때문에 국가의 물리력을 무장투쟁으로 무력화하더라도 학교·교회·보수단체 등 시민사회에 산재한 자본주의의 참호들이 버티고 있어 체제는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민사회 속에 다양한 진보적 조직(진지)들을 만들어 교육과 문화·선전 등을 통해 대항 헤게모니를 확대해 나가는 장기간의 진지전을 펴 나가야 한다.

그람시는 또 미국 포드자동차의 실험 등에서 ‘저임금, 장시간 노동’의 낡은 자본주의 체제와는 다른 ‘포드주의’라는 변화를 선구적으로 주목했다. 즉 기계화를 통해 대량생산하고 이에 따른 생산성 향상을 임금 상승에 연계해 상대적으로 고소득 노동자를 만들어내고, 이들이 대량생산된 자동차 등을 사도록 해 체제 내에 안주하도록 유도하는 새로운 자본주의 체제가 등장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러시아 혁명과 같은 혁명이 불가능해진 현대사회의 특징들과 관련해 그람시는 진보 이론가들과 실천가들의 주목을 계속 받고 있다. 특히 그가 평소 민속·상식·문화를 강조한 만큼 문화이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주류이론의 경우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시민사회론 등을 통해 그의 이론적 유산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 같은 영향력 덕으로 옥중수고 중 영어로 출간되지 않은 미출간 원고들을 다섯 권으로 완역해 출간한다는 계획 아래 제3권이 얼마 전 출간됐고 나머지 두 권도 출간될 예정이다. 

※신(新)고전=지난 반세기 동안 출간된 책 중 현대사회에 새로운 시대정신이나 문제의식을 제공한 명저.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산하 ‘좋은 책 선정위원회’가 중앙SUNDAY 독자들에게 매주 한 권의 신(新)고전을 골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