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인 ‘판정승’ 4대 포인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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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 12면

진한 사투리가 표준말 눌러

변호인이 판정승을 거둔 요인은 감성에 호소하는 전략에 있었다. 그러나 전정호 변호사의 진한 대구 사투리가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이 전략이 빛을 발하기 어려웠을 가능성이 크다.

이날 재판에 참여한 배심원들은 대구지법 관할 구역인 대구 중구와 영천시 등 9개 시·군·구에서 무작위로 선정됐다. 이들 앞에서 전 변호사는 “내뺄 수도 안 있습니까” “할매를 업고선…” 같은 사투리와 억양을 수시로 구사했다. 대부분 법정에 처음 나온 배심원들에게 전 변호사의 사투리는 안정감·친밀감·호감을 줬을 것이란 분석이다. 예비 배심원 백모(31)씨는 “대구 사람이다 보니까 사투리가 더 친숙하게 들렸던 게 사실”이라고 했다. 경북고·경북대 출신인 전 변호사는 재판 후 “변론에 몰입하다 보니, 설득력 있는 표현을 쓰려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투리가 나왔다”고 말했다.

반면 공판검사인 최창민 검사 등 검찰 측은 또박또박 표준말을 썼다. 최 검사는 “부산 출신이긴 하지만 서울에서 오래 생활해 사투리를 쓰지 않는다”면서 “표준말이 불리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방청석에 있던 한 변호사는 “아무리 유명한 변호사라 해도 대구 법정에서 서울 말씨를 쓰면 거부감을 일으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이젠 변론 전략도 지역정서를 감안해 짜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파워포인트보다 미혼모 여동생이 감성 자극

검찰은 이날 재판에서 파워포인트 프로그램으로 만든 자료 화면을 슬라이드로 보여줬다. 배심원들이 공소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특히 핏자국이 낭자한 범행 현장과 병원 응급실에 피투성이로 누워 있는 피해자 할머니의 얼굴을 클로즈업했다. 피고인 이씨가 피해자와 만나 골목 안으로 들어가고, 흉기로 위협하는 장면을 재연한 사진도 제시했다. 검찰은 “여러분이 이런 일을 당하고, 이런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해 보라”며 이씨의 범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부각시키는 데 주력했다. 흉기와 마스크·목장갑 같은 증거도 이례적으로 실물을 내놓았다.

전 변호사가 ‘히든 카드’로 준비한 것은 피고인 이씨의 여동생. 미혼모인 이 여동생은 증인석에서 젖먹이에게 젖병을 물린 채 변호인·검찰 측 신문에 답했다. 여동생은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술독에 빠진 아버지 밑에서 힘들게 보낸 성장기를 밝혀 법정을 숙연하게 했다.

전 변호사는 “피고인이 오토바이 사고 합의금에다 미혼모 여동생의 셋방을 얻어주기 위해 사채를 썼다”며 “사채업자가 하나뿐인 여동생도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해 순간적으로 실수하게 됐다”고 말했다. 철저히 준비된 전술이었다. 재판 후 전 변호사는 “여동생이 ‘아이를 맡길 데가 없다’고 해서 그냥 데리고 나오라고 했다”며 “맡길 데가 있었어도 데리고 나오라고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공법보다 ‘치고 빠지기’ 작전

전 변호사는 피고인 이씨의 범행 사실을 부인하는 데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대신 집행유예로 풀려날 수 있도록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고 ^이씨가 신고하도록 요청한 것이 형량을 낮출 수 있는 ‘법률상 자수’에 해당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 두 개의 포인트를 중심으로 재판의 흐름에 따라 ‘치고 빠지기’를 거듭했다.

목격자로 나온 동네 통장 입에서 “병원에서 이씨가 ‘경찰에 신고하라’고 강요했다”는 말이 튀어나왔을 때였다. 전 변호사는 ‘강요’라는 단어를 놓치지 않았다.
“강요했다는 것은 이씨가 신고해 달라고 강하게 부탁했다는 얘기이지요?”

검찰은 즉각 “유도신문”이라며 이의를 제기했다. 겉으로는 전 변호사가 ‘실수’한 것처럼 비쳤다. 하지만 배심원들의 뇌리엔 이씨가 신고를 강청했다는 사실이 각인됐다.

검찰은 정공법으로 일관했다. 신문 시나리오에 따라 범죄 사실을 조목조목 입증해 나갔다. 이씨가 어떻게 계획적으로 범행을 준비했는지, 이씨의 범죄 성향이 얼마나 큰지를 역설했다. 그 결과 유죄를 이끌어냈지만 선고 형량은 구형량에 크게 못 미쳤다.
이것은 검찰의 잘못이라기보다 우리 형사재판의 구조 탓이 크다. 검찰은 ‘공익의 대변자’로서 피고인의 불리한 면뿐 아니라 유리한 면도 가감 없이 밝혀야 한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는’ 기동력을 발휘하기 힘든 이유다.

자리배치·복장도 유리

이번 재판을 통해 제기된 논란 중 하나는 법정의 자리 배치와 복장을 둘러싼 것이었다.

검찰은 공판검사(최창민 검사)와 수사검사(윤중기 검사)가 ‘콤비 플레이’를 펼쳤다. 메모와 관련 자료 찾기 등을 협업함으로써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그러나 검사들이 앉아 있는 자리가 재판에 불리하게 작용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배심원단 바로 옆에 나란히 앉다 보니 배심원들의 표정을 살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배심원석 맞은편에 앉은 변호사는 검찰 신문 등에 따른 배심원단의 분위기 변화를 재빠르게 포착해 바로 대응할 수 있었다.

증인석의 경우 변호인석과 나란히 배치돼 다시 유불리가 갈린다. 재판부와 마주 보고
앉아 양측 모두 배심원석 동정을 살필 수 있는 미국과 법정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이 재판에서 검사들은 법복을 입었고, 변호사는 양복을 입었다. 전문가들은 “배심원들이 법복을 입은 검사에 더 신뢰감을 갖지 않겠느냐”며 “무기대등의 원칙에 어긋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당사자인 전 변호사는 “나에게 법복을 입으라고 했어도 안 입었을 것”이라고 했다. 일반 국민인 배심원 눈에는 법복이 권위적으로 비칠 수 있어 꼭 유리하다고 보기 어렵다는 얘기다.


도움말 주신 분: 신동운 서울대 교수, 한상훈 고려대 교수, 원재천 한동대 교수, 이재석 법원행정처 심의관, 안성수 대검 검찰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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