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준수영화산책>"말미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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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바닷속에서 바위를 더듬는 해녀의 모습은 암벽을 타는 알피니스트와 흡사하다.숨이 가빠질 무렵 수면을 향해 솟구치는 자태는 동화속의 인어가 인간이 되고싶어 바다를 박차는 형상이다.『말미잘』에서 수중촬영으로 나타나는 해녀 주인공의 부상 (浮上)장면은 인간선언의 의미가 강하다.
남편을 바다에 여읜 젊은 과부의 인간적 갈등이 절절히 나타나있다.자신을 짝사랑하는 홀아비선장을 마다하고 잘생긴 도시청년을선택하는 그녀는 말은 안하지만 아홉살난 아들을 통해 모든 것을이야기한다.
소년은 여성의 성(性)을 닮은 말미잘을 갖고 여자애들과 놀기를 좋아하는데,섬마을에서 벌어지는 어른들의 섹스현장을 훔쳐보며성에 눈뜬다는 내용이다.자신만을 사랑하는 줄 알았던 엄마가 뜨내기 사랑방손님과 누워있는 현장을 목격한 꼬마의 충격과 분노는해맑은 동심의 상처가 무엇일지를 느끼게 한다.장소불문하고 벌어지는 어른들의 섹스행위나 때없이 등장하는 나체장면은 스크린을 꽤나 끈적끈적하게 만들 것 같은데 영화의 색깔은 의외로 담백하다.농염한 소재이면서도 말초신경을 자극하지 않는 것은 노련한 유현목감독의 예술적 감각이 작용한 때문일 것이다.
성이 영화의 주제가 될 때마다 어째서 섬마을이 단골무대가 돼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화제를 모았던 『갯마을』이나 『그섬에 가고싶다』도 비슷한 소재의 비슷한 장소인데 갯내음을 맡고 사는 여인들은 모두 정염의 화신이 되는 것일까.애 욕의 포로들이 반드시 섬마을에만 있는 것이 아닐텐데 젊은 과수댁이 많은 곳이라 해도 너무 자주 등장한다.더구나 요즘은 해난(海難)보다육난(陸難)이 많은 시대가 아닌가.그러나 말미잘과 어촌은 절묘한 조화가 있어 좋다.
영화 자체보다 원로 유현목감독이 14년만에 메가폰을 잡은 작품이라는데 우선 관심이 간다.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소재로 삼고 있어서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데도 관능이 절제된 것은 감독의 투철한 작품지향성 때문이 아닌가 싶다.
다양한 등장인물속에 폐인처럼 사는 난파선 선장의 인간상이 유독 눈길을 끈다.술로 울분을 달래다가 끝내 바다로 사라진 그는이상과 현실의 틈새에서 좌절한 외로운 현대인의 모습이다.
편집담당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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