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에 선 버냉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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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버냉키(54)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취임 2년 만에 위기에 처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4일(현지시간) “다음 대통령이 그를 재신임할지 의문”이라고 보도했다. 그의 임기가 끝나는 2010년 1월에 재임이 어려울 수 있고, 상황에 따라선 그 전이라도 중도하차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는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미국 경제를 침체로 몰고 갔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FRB 의장은 ‘세계 경제 대통령’이라 불린다. 전임자인 앨런 그린스펀이 특히 그랬다. 1987년부터 19년간 자리를 지키며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경제를 주물렀다. 그가 입을 열면 곧바로 세계 증시가 출렁거렸다. 87년 블랙 먼데이(세계 증시 대폭락)와 90년대 고유가 문제를 풀어 내며 영웅이 됐다.

그린스펀의 그늘은 후임자에게 늘 부담이었다. 2005년 11월 상원 인준청문회에서 버냉키는 “그린스펀의 통화정책 계승이 최우선 목표”라고 말했다. 전임자와 달리 그는 유명 경제학자 출신이다. 스탠퍼드·프린스턴대 교수를 지냈다. 그러나 이런 경력은 실물경제에 대한 감이 떨어진다는 비판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취임 뒤에도 한동안 그린스펀의 영향력이 유지된 게 버냉키의 짐이 됐다. 그린스펀은 지난해 블룸버그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여전히 (시장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았다”며 “이것이 버냉키 의장을 힘들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린스펀은 14일 휴스턴의 한 행사에서 “미국 경제가 침체의 경계선(edge)에 있다”며 위기에 빠진 후임자의 속을 긁었다.

버냉키에게 쏟아지는 비판의 핵심은 이번 위기에 신속히 대응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WSJ는 그에 대해 “당파를 초월해 성실히 일하는 존경받는 경제학자”라면서도 “경제를 살릴 수 있을 만큼 빨리 움직였는지는 의문”이라고 평가했다.

미국의 주요 대선주자들도 비판적이다. 공화당 후보로 유력한 존 매케인 상원의원은 “그가 현 상황에 적절히 대응하는지 의심스럽다”고 밝혔다. 버냉키 지지를 밝힌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마저 “FRB와 감독기관이 좀 더 빨리 움직여야 했다”고 지적했다.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도 금융 당국이 너무 느슨해 위기를 악화시켰다는 입장이다.

버냉키는 14일 상원 금융위 청문회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시장의 기능이 사실상 중단됐다”며 “경기의 하강 위험이 여전하다”고 말했다. 이어 “경기 둔화를 막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적기에 취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월가에선 FRB가 3월께 기준금리를 0.5%포인트 추가 인하할 것으로 보고 있다.

버냉키는 1930년대 미국 대공황의 전문가다. 그는 종종 “세계 경제를 이해하려면 대공황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 그가 지금 경기침체 때문에 위상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WSJ는 교체가 가시화될 경우 민주당 측에선 재닛 옐렌 샌프란시스코 연방준비은행 총재나 앨런 블라인더 프린스턴대 교수, 재무장관을 지낸 로런스 서머스, 로버트 루빈 중에서 후보가 나올 것으로 봤다. 공화당 쪽에선 마틴 펠트스타인 하버드대 교수, 글렌 허버드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장, 존 테일러 전 재무차관 등이 거론되고 있다.

뉴욕=남정호 특파원, 김선하 기자

버냉키의 말말말

- “그린스펀의 통화정책 계승이 최우선 목표”(2005년 11월 상원 인준청문회)

-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이 미국 경제 전반으로 확산되지 않을 것”(2007년 6월 IMF 화상회의)

- “미국 금융은 전반적으로 좋은 상황”(2007년 7월 하원 금융위)

- “상당한 경기하강 위험 있어”(2008년 1월 기준금리를 0.75%포인트 내린 뒤)

- “경기둔화 막기 위해 필요한 조치 취할 것”(2008년 2월 14일 상원 금융위 청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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