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리의 유적지 티파자에서 전통 의상을 입은 여성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필자. 이 곳에서 알베르카뮈가 ‘이방인’을 썼다.
그해 알제리를 방문하고 온 노무현 대통령이 “알제리에서 우리나라 전통예술 공연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국립극장에 권유했다. 이름도 익숙하지 않은 나라에 가는 데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알면 알수록 정말 재미있는 나라가 알제리였다. 알제리에서는 영어가 전혀 통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식당에서 “워터(water)”라는 말도 못 알아들을 정도였다. 어디서든 프랑스어를 써야 했다. 그리고 수도 알제의 중심가는 하루 종일 교통체증으로 북새통이었다. 대중교통 수단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해안선이 1200km에 달하는데도 고기잡이를 안 해도 될 만큼 알제리의 경제는 괜찮았다. 알제리인들은 한국을 다른 어느 나라보다 사랑하는 것 같았다. 자동차는 현대, 휴대전화는 삼성, 가전제품은 LG를 애용했다.
우리가 알제리 국립극장에서 연주하는 날, 멋쟁이 문화부 장관도 객석에 앉아 있었다. 그는 옆자리에 앉은 한국대사에게 “오늘 중요한 사람의 장례식이 있어서 끝까지 보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단다. 그런데 연주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한국의 춤과 음악에 매료됐기 때문이었다. 이만큼 공연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알제리인들은 한국을 사랑하는 만큼 우리 공연에도 마음을 줬다.
알제리는 풍부한 자원을 갖고 있지만 선진국으로 불릴 만큼 부유한 나라는 아니었다. 알제리에 도착한 우리는 프랑스 파리에서 부친 짐을 찾을 수 없었다. 연주할 악기가 없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우리 짐을 따로 싣고 오던 알제리 비행기가 무슨 까닭인지 파리로 돌아가 버렸다는 것이다. 결국 짐은 그날 밤늦게 도착했다. 하루 동안 여유 있게 준비하려던 스태프들이 밤을 꼬박 새웠다. 무대의 영광은 연주자들에게 돌아가기 마련이지만 사실은 스태프들의 숨은 공로가 더 큰 법이다.
유구한 역사를 통해 로마·아랍·프랑스 등으로부터 끊임없이 식민 통치를 당했으면서도 한 번도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다고 믿는 나라가 알제리다. 광활한 사막과 험준한 산악지대에 흩어져 살면서 고유 문화를 지켜왔다는 것이다. 나는 그 자존심 센 여성 장관이 따라주던 뜨거운 차의 박하향을 지금도 못 잊는다.
황병기<가야금 명인>가야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