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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別世 金溶植 前외무장관-한국외교 초창기 개척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1면

김용식(金溶植)前외무장관은 지난 48년부터 81년까지 33년간 외교현장의 가운데에서 한국외교를 진두지휘한 개척자다.
1913년 경남충무에서 출생한 고인(故人)은 일본 중앙대 법학부에서 수학했다.38년 25세의 나이로 일본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후 해방직후인 46년부터 변호사로 일했다.
그러다 중학교 은사인 故 변영태(卞榮泰)前외무장관이 필리핀 특사로 임명되면서 고인에게 수행원으로 따라갈 것을 권유했다.「한달만 바람을 쏘인 뒤 다시 변호사로 일하겠다」던 그의 생각은잠시뿐.은사의 소개로 이승만(李承晩)대통령을 만 난 뒤 駐홍콩총영사를 시작으로 외교관의 길로 들어섰다.고인이 67년 유엔대사로 재직할 때 3등서기관으로 일을 배웠던 사람이 바로 현 이시영(李時榮)외무차관과 박건우(朴健雨)주미(駐美)대사였다.李차관은 1일『영어실력이나 상대방을 설 득하는 능력,국제흐름을 읽는 눈에서 고인은 외교관의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었다』면서『콧수염을 길러 영국신사로 통했던 풍모까지도 타고난 외교관』이었다고 추모했다.
특히 고인은 남북대결 일변도였던 외교정책을 평화공존의 흐름으로 전환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외무장관시절 유엔에서 소모적인 남북표대결을 피하기 위해71,72년 유엔에서의 남북문제 토의가 연기되도록 하여 우리 외교의 흐름을 바꾸었으며 73년의「6.23」선언은 바로 이같은흐름의 연장선상에서 나왔다.고인은 후배외교관들 에게「발로 뛰는외교」를 역설해 왔다.
〈金成進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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