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비사로 새 인생 … 법대 출신 33대 종손의 귀향 희망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6면

정상원씨가 토크렌치를 들고 자동차 엔진을 점검하고 있다. 정씨는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 대신 푸른 작업복 차림으로 제2의 인생을 펼치고 있다. [사진=김상선 기자]

동래 정씨 문익공파의 33대 종손인 정상원(34·서울 성북동)씨는 자동차 정비사다. 그는 설 연휴 전날인 5일에도 하루 종일 자동차와 씨름했다. 일명 ‘기름밥’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서울 양평동 정일자동차정비공사에서 만난 정씨의 손가락은 상처투성이였다. 그는 “자동차검사를 담당하는데 뜨거운 엔진을 만지다 보면 화상을 입기 일쑤예요. 이게 진짜 기술자의 손이 아니겠습니까”라며 환하게 웃었다.

원래 그의 꿈은 정비사가 아니었다.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검사였다. 대학도 단국대 법학과를 나왔다. 1998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검사가 돼 집안을 일으키겠다”며 사법고시에 도전했다. 신림동 고시촌에서 4년을 지냈다. PC방·만화방 아르바이트까지 해 가며 사시에 매달렸지만 번번이 낙방했다. 2002년 여섯 번째 1차 시험에 떨어진 정씨는 신림동 생활을 접었다.

◇청년실업의 장벽 실감=그리고 뛰어든 취업 전선은 또 다른 시련을 안겨줬다. “연봉 3000만원은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정씨는 대기업 법무직을 비롯해 서른 곳이 넘는 회사에 원서를 냈다. 하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대부분 서류전형에서 탈락했다. 간혹 기회가 주어진 면접에서도 회사 관계자들의 표정은 싸늘하기만 했다. 무서운 ‘청년실업의 장벽’을 실감한 것이다. 직장을 얻기 위해 애썼던 3년 동안 담배만 늘었다.

그런 그에게 인생의 전환기가 찾아왔다. ‘숙련 기술자가 되면 화이트칼라 회사원 부럽지 않은 수입을 올릴 수 있다’는 한국폴리텍대학의 학생모집 광고를 본 것이다. 정씨는 ‘써먹을 기술을 갖고 있다면 이렇게 암담한 처지가 되진 않을 텐데’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인생의 방향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2006년 폴리텍대 자동차학과 1년 과정에 등록한 정씨는 미친 듯이 공부에 매달렸다. 처음엔 공구를 쥐는 게 어설퍼 떨어뜨리기 일쑤였다. 엔진오일을 잘못 빼다 머리에 뒤집어쓰기도 했다. 그렇지만 “여기서 물러날 수 없다”는 오기로 버텼다. 오전 9시 등교해 오후 5시에 수업이 끝났지만 정씨는 오후 10시까지 남아 자격증 시험 준비에 몰두했다.

그 결과 1년 동안 여섯 개의 자동차 관련 자격증을 땄다. 권역별로 한 명에게 주는 노동부 장관상도 그의 몫이었다. “요즘 아들 뭐 하느냐”는 친구들의 전화를 받을 때마다 얼버무리던 정씨의 아버지도 그 무렵엔 “우리 아들이 장관상을 받았다”고 자랑했다.

◇10년 만에 찾아가는 선산=졸업을 앞둔 2006년 말 정씨는 현재 일하는 공업사에 지원했다. 사장은 “법학과 나온 사람이 이런 일을 할 수 있겠느냐”는 걱정부터 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버티겠다”는 정씨의 답변을 듣고 채용했다. 그는 지난해 연봉 2300만원을 받았다. “예전 같으면 만족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꿈이 있지 않느냐”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는 2~3년간 경험을 쌓은 뒤 외국에 진출해 정비공장을 차릴 계획이다.

정씨는 지난해 11월 결혼도 했다. 취업에 실패한 자신의 처지 때문에 호감을 갖고 있으면서도 속마음을 밝히지 못했던 여자 친구에게 프러포즈를 했던 것이다. 전세 5000만원짜리 72.73㎡(약 22평) 집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종손인 정씨는 이번 설에 충남 아산의 선산으로 성묘를 갈 생각이다. 10년여 만이다. ‘언제 취직할래’ ‘결혼은 언제 할거냐’는 어르신들의 걱정이 부담돼 찾아뵙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취업 전선에서 고민하고 있는 청년들에 대한 충고도 잊지 않았다. “처음부터 너무 높은 목표와 편안하게 일할 직장만 바라보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전 너무 늦게 깨달았지만 생각을 바꾸면 길이 보입니다.”

넥타이를 풀면 새로운 희망이 보인다는 게 그의 새해 덕담이다.

글=이충형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한국폴리텍대학= 노동부 산하 직업교육 전문 기능대학. 권역별로 11개 대학, 40개 캠퍼스에 2년(전문대) 과정 65개, 1년 과정 50개 학과가 개설돼 있다. 매년 1만2300여 명의 전문 기술인력이 배출된다. 1년 과정의 학비는 무료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