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유럽·중국까지 ‘공동 변론’은 글로벌 트렌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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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2003년 일본의 특허 관련 소송에 큰 변화가 생겼다. 변호사와 변리사가 공동으로 변론을 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 똑같은 법에 따라 변리사 제도를 도입한 한국과 일본 중 일본이 특허 전쟁 시대를 맞아 먼저 옷을 갈아입은 것이다. 한국은 이웃 나라의 이런 의미 있는 변화를 보고도 짐짓 외면하고 있다.

◇일본의 변신=1909년 변리사 제도를 도입한 일본도 2003년 법 개정 전까지는 변호사만 특허 침해 소송의 변론을 맡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도 같은 해 일본의 제도를 그대로 들여와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일본이 변리사에게 법정 문을 개방한 것은 특허 전쟁 시대를 맞아 법률 소비자의 권익을 높이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특허 침해 소송에서 변호사가 특허 기술을 잘 몰라 심리가 지연되고, 소송 당사자의 이익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 5년 전 일본의 법 개정 사유는 이랬다.

99년 9월 일본 지적재산연구소는 특허침해 소송에서 수요자들이 느끼는 불만이 무엇인지 조사했다. 설문 결과 응답자의 16%만이 ‘현행대로 변호사만 소송을 맡게 해야 한다’고 답했다. ‘변호사와 변리사를 공동으로 선임해야’가 41%, ‘변리사 단독으로 소송 대리’가 43%에 달했다. 이런 인식에 경제단체들이 변리사법 개정을 강하게 요구하면서 마침내 법이 바뀌었다.

일본이 변호사·변리사 공동 변론제를 도입했다고 해서 모든 변리사가 변론 자격을 갖는 것은 아니다. 소정의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일본의 변리사 중 법정에 설 수 있는 자격을 딴 사람은 800여 명이다. 히비야 파크법률사무소의 가미야마 히로시(上山浩) 변호사는 “변호사 단독 변론은 소비자(의뢰인)에게 결코 득이 되지 않는다”며 “변호사와 변리사가 공동으로 소송을 맡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일본 변호사계는 공동 소송제 도입 이후 시장이 더 커져 수입이 늘어났다고 밝혔다.

일본은 2005년 특허 출원 건수가 42만7000여 건으로 세계 1위다. 미국 특허청에 특허를 내는 건수도 세계 1위다. 이러다 보니 일본 기업들은 특허 침해 소송 업무가 많다. 일본의 지적재산권 침해 소송은 2001년 836건, 2003년 932건, 2005년 807건, 2006년 820건에 달했다.

도판법무팀 야마자키 노부마사(山崎紳正) 지적재산부장은 “특허 침해 소송은 기술 권리 내용이 아주 복잡하기 때문에 변리사의 기술적인 지원이 특히 중요하다”며 “변호사와 변리사를 동시에 법률 대리인으로 선택할 수 있어 기업으로서는 아주 좋아졌다”고 말했다.

◇변호사·변리사 ‘동맹 강화’는 글로벌 트렌드=일본뿐 아니라 영국·독일·중국 등 주요 선진국도 특허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변호사와 변리사 ‘동맹’을 강화하고 있다. 이들 나라는 변리사가 변호사와 공동 또는 단독으로 법정에 설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서로 부족한 것을 보완해 주는 관계다. 변호사는 법률적 판단을, 변리사는 특허 기술의 권리, 침해 여부를 판단한다.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중국도 변호사·변리사 공동 변론은 물론 변리사 단독 변론을 허용하고 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黑猫白猫)론의 실용주의 사상이 특허 침해 소송에서도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은 일반 변호사와 별도로 특허변호사가 따로 있다. 특허 분쟁은 이들이 주로 맡는다. 특허변호사는 이공계 출신 변호사로서 변리사 시험에 합격해야 자격을 얻을 수 있다.

우리나라처럼 변호사 시험에 합격만 하면 자동으로 변리사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과는 딴판이다. 특허변호사는 사실상 한 사람이 두 개의 자격증을 가짐으로써 경쟁력을 아주 높인 경우다.

채영복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장은 “세계는 지금 기술 전쟁의 시대다. 변호사와 변리사가 힘을 합쳐도 살아남기 어렵다”며 “그런 점에서 특허 관련 소송제도는 하루빨리 개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박방주 과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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