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북카페] 앙드레 지드, 헤밍웨이 … 책벌레들이 사랑한 그 곳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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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책벌레들에게는 사연이 많다. 책 구하고, 읽고, 그 즐거움 나누는 과정에서 숱한 이야기거리가 태어난다. 서점에 얽힌 이야기는 의당 주메뉴다. 저 ‘책의 자궁’에 관한 추억을 빼놓고 어찌 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는가.

실비아 비치는 목사의 딸로 프랑스 현대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파리로 가 유학생을 대상으로 목회를 한 아버지 덕분에 프랑스와 직접적인 인연을 맺었다. 귀국했다가 프랑스로 돌아와 문학을 깊이 있게 공부하려 했다. 그러다 파리에 미국문학 전문서점을 차렸다. 이름하여 ‘셰익스피어 & 컴퍼니’. 애초에는 새 책을 파는 서점으로 꾸려나가려 했지만, 환율 문제 같은 사정이 있어 도서대여점으로 출발했다. 개점한 다음 두 번째 손님이 그 유명한 앙드레 지드였다니, 프랑스 지식인 사회에 이 서점이 끼친 영향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프랑스로 관광오거나 실질적으로 망명한 작가들도 서점의 단골 손님이었다. 영국에서는 에즈라 파운드가 찾아오고, 미국에서는 헤밍웨이가 들렀다. 각별히 헤밍웨이와 얽힌 일화는 흥미롭기 짝이 없다. 헤밍웨이가 보기에 비치는 전형적인 문학소녀였던 모양이다. 자기가 고등학교 졸업 전에 아버지가 총 한 자루만 유산으로 남긴 채 돌아가셨고, 졸지에 가장 노릇하느라 권투시합을 해서 돈을 벌기도 했 다고 말했다. 이 일화가 소개된 『셰익스피어 & 컴퍼니』 (뜨인돌)를 보면, 공식적인 약력에 이상의 내용이 들어가 있지 않다며 자기만 아는 은밀한 이야기인양 되어 있다. 그러나 책의 각주에 보면 이 모든 것은 허풍이었다. 부친은 외과의사였는데다 헤밍웨이가 기자 겸 작가로 활동하던 29세때 자살했다.

이 책은 어느 면에서는 문단이면사의 성격도 띠고 있다. 셰익스피어&컴퍼니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를 출판한 덕이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서점이 문을 연 1920년. 조이스가 『율리시즈』를 영국의 ‘에고이스트’에 연재했는데 선정성을 이유로 항의를 받게 되자 미국의 ‘리틀 리뷰’로 옮겨 연재했다. 그러나 이 잡지도 압수되는 수모를 겪다 결국 폐간되고 말았다. 조이스는 결국 자신의 책이 출간될 수 없으리라 낙담하고 있었는데, 비치가 출판하겠다고 나섰던 것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조이스에 관해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기록될 수 있었다.

『채링크로스 84번지』 (궁리)는 미국 작가와 영국의 고서점 직원 사이에 오고간 편지를 모아놓은 책이다. 헌 책을 집어들면 저절로 펼쳐지는 대목이 있다. 전 주인이 즐겨 읽던 곳인데, 마침 펼쳐진 곳에 “나는 새 책 읽는 것이 싫다”라는 구절이 적혀 있었다. 헬렌 한프는 그때 이렇게 외쳤다 한다. “동지!”라고. 책의 품격은 내용에서만 비롯되지 않는다. 그것을 감싸고 있는 물질적 속성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술적 가치가 높은 오래된 책을 만지는 손길은 사랑하는 연인의 몸을 애무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 “함부로 만지지도 못하겠”노라 할 수밖에!

이제 책벌레들의 수다에서 서점 항목은 사라질지도 모른다. 인터넷 서점이 맹위를 떨치고, 대형 서점만 남는 것이 현실이니 말이다. 하긴, 더 큰 문제는 책을 멀리 하는 사회분위기다. 청소년들마저 영어몰입교육을 받아야 한다면 도대체 책은 언제 읽으란 말일까. 답답하기만 하다.

이권우 <도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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