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니의 ‘베타’ 실패 기억하나 “SKT가 그꼴 날 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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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SK텔레콤은 위기다. 이대로 가면 ‘소니의 베타 방식 실패’를 답습할 지 모른다. ”

SK그룹 최태원(48) 회장 입에서 ‘베타 방식’이란 말이 나오자 자리에 있던 일부 SK텔레콤 사외이사들이 움찔했다. 순간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최 회장은 평소에도 매출 정체와 이익 감소로 주가가 지지부진한 SK텔레콤에 대해 “이대로 가면 안된다”는 발언을 자주 해왔다. 국내 이동통신 시장이 이미 포화상태로 성장은 한계에 부딪힌 데다 과거 독과점적 지위를 누렸던 규제의 틀이 바뀌고 있는데도 회사가 이동통신 사업에 안주하는 상황을 걱정한 것이다. 하지만 최 회장의 이날 베타 방식 언급은 그가 얼마만큼 강하게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줬다는 점에서 과거와는 그 무게가 달랐다.

최 회장은 지난해말 SK와 SK텔레콤 사외이사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SK텔레콤에 대한 위기의식을 여과없이 드러냈다. 그는 이날 “(현재 SK텔레콤의 주력 이동통신 서비스인) CDMA(코드분할다중접속)방식은 이제 저무는데 우리는 이에 대한 대응을 소홀히 했다”며 성능은 더 우수했지만 마쓰시다의 VHS방식에 밀려 결국 시장에서 사라진 소니의 베타 방식 VTR을 예로 들었다. 소니의 베타 방식 VTR 제작은 소니의 대표적인 실패 사례로 꼽힌다.

사실 이 자리는 처음부터 그렇게 무거운 자리는 아니었다. 최회장은 SK와 SK텔레콤 사외이사들과 함께 송년회를 하기로 한 날 송년회 몇 시간 전에 사외이사들을 먼저 만났다. 그는 여기서 30분 넘게 직접 SK텔레콤에 대해 열성적으로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사외이사들에게 SK계열사들이 ‘따로 또 같이’하는 책임경영을 하면서 SK브랜드를 어떻게 키워나갈 지를 설명하는 게 이날의 주된 안건이었다. 하지만 최 회장은 2시간 동안 얘기의 대부분을 SK텔레콤의 과거의 현재, 그리고 미래에 할애했다.

그는 “한국이 CDMA를 세계 최초로 상용화했지만 전세계가 GSM(유럽식 디지털이동통신망)방식으로 갈 때 CDMA만 고집하다 결과적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한계에 부딪힌 게 아니냐”고 지적하면서 “2003년 진출한 베트남 시장에서 SK텔레콤이 생각보다 큰 성과를 올리지 못하는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 생각해봐야 한다”고도 말했다. GSM방식은 CDMA방식과 달리 칩만 바꿔 끼우면 어떤 단말기로 어디서든 사용할 수 있다.

일부 사외이사는 등기이사도 아닌 최회장이 이렇게 거침없이 질책을 쏟아내자 간섭으로 느끼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동감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최 회장은 이어 “지금까지 글로벌화를 추진한다고는 했는데 큰 성과는 없는 것 같다”며 “앞으로 적극적으로 인수합병(M&A)이나 지분투자를 통한 전략적 제휴를 해야 한다”는 말도 했다.

이와 관련 SK텔레콤의 한 임원은 “최 회장은 평소 수백억원 규모의 소규모 프로젝트를 수없이 하는 건 미래의 먹거리찾기와 거리가 멀다고 강조한다”며 “미래를 내다보고 규모가 조 단위로 크더라도 가능성만 있다면 돈 아끼지 말고 과감하게 투자하라고 요구한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SK텔레콤은 최근 경영진이 총동원돼 신규 사업 찾기에 나섰다. 미국 3위의 이동통신 스프린트넥스텔의 인수 작업도 다시 검토하고, 지난해 하반기 미국 실리콘밸리에 잇따라 설립한 해외법인 두 곳에서도 M&A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또 다른 SK텔레콤 임원도 “최회장이 임원들을 자주 불러 수시로 ‘겁’을 준다”며 “예컨대 ‘5년 전엔 (미래를 준비할 시간으로) 10년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여러분들이 5년을 그냥 까먹었다’거나 ‘이대로 가면 5년 안에 망한다’고 말하며 빠른 변화를 요구한다”고 말했다.

최근 도입한 CIC(Company in Company)제도도 이같은 맥락에서 나왔다는 설명이다. 인터넷 사업이든 글로벌 사업이든 결국 통신 인프라를 쓰기 때문에 SK텔레콤의 통신 부문이 지나치게 의존적이고 경쟁력이 떨어졌다는 인식 아래 별도 사업부로 떼냈다는 것이다.

최회장은 아예 SK텔레콤 본사에 집무실을 마련, 일주일에 두번씩 출근하며 직접 챙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회장의 한 측근은 “최회장은 등기이사가 아니라 세세한 것까지 챙길 수는 없겠지만 큰 그림은 직접 그리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며 “최회장의 고민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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