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3·1절 정신 어디로 갔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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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무엇인가 하나도 제대로 풀리는 일이 없는 답답함이 우리 사회를 짓누르고 있다. 정치.경제.사회.교육 등 어떤 분야도 혼란과 침체 속에서 허덕이고 있으며 이 나라를 떠나서 이민의 길을 택하겠다는 젊은이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어도 결코 이상하지 않은 지경에 이른 것이다.

'아아 신천지가 안전(眼前)에 전개되도다'라는 3.1절의 감격은 끝내 우리에게 되돌아오지 못한단 말인가.

*** 자신감 잃고 개탄의 소리만 들려

폴란드의 한 정치인은 '역사는 끝나지 않았으며 미래로 돌아간다'고 이야기했다. 과거로 돌아가지 않고 미래로 돌아가겠다는 일견 모순된 표현은 우리가 처한 오늘의 상황에서 볼 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무작정 전진하는 것만이 상책은 아니다. 지나간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며 오늘의 우리의 자세를 반성하는 가운데 미래로 향한 올바른 방향이 설정될 수 있어야 한다. 3.1절은 우리에게 미래로 돌아갈 수 있는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다.

1919년은 우리 민족에게 참으로 어둡고 괴로웠던 시기였다. 나라를 송두리째 잃어버리고 군국주의 총독 치하의 식민지로 전락한 우리 민족의 참상이 어떠했을까는 오늘의 우리들은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이다. 그러나 민족의 자주와 자유를 위해 독립운동의 봉화를 높이 쳐든 3.1운동에서 선조가 보여준 도도한 자신감과 의연함을 되돌아 볼 때 우리는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처럼 어려웠던 역경 속에서도 끝내 당당했던 조상에 비해 오늘과 같은 좋은 조건 속에서 왜 우리는 자신감을 잃어가며 개탄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일까. 무엇이 우리를 이처럼 초라하게 만들어가고 있는가.

한마디로 격(格)과 품위의 문제라 하겠다. 개인과 마찬가지로 나라에도 갖춰야 하는 격과 품위가 있다.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를 잃은 지 10년이 흘렀으나 우리의 조상은 나라와 민족의 정체성에 대한 확실한 신념으로 흔들림이 없었고 일시적 시련을 반드시 극복하겠다는 믿음과 여유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침략자보다 침략당한 우리가 오히려 높은 격과 품위를 지녔으며 세계사의 주류에 순응하고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엄숙한 양심의 명령으로서 자가(自家)의 신 운명을 개척함이요, 결코 구원과 일시적 감정으로서 타를 질축배척(嫉逐排斥)함이 아니로다'라는 독립선언서의 구절은 3.1운동 당시 우리 민족의 자신감을 나타내고 있다.

급한 상황에서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것이 곧 높은 격을 반영하는 것이다. '일본의 무신(無信)을 죄하려 아니하고 소의(少義)함을 책하려 아니 하노라'라는 여유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의 독립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일본에 대한 두려움과 의심이 '동양 전국의 공도동망(共倒同亡)의 비운을 초치할 것임'을 걱정하는 여유가 바로 우리의 민족적 품위를 반영했던 것이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나라의 격이나 품위를 생각하는 여유를 잃고 있다. 우리는 이웃나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나라다. 지리적으로 인접한 중국.러시아.일본이나 지난 반세기에 걸쳐 동맹국으로 지내온 미국에 비해 인구.국토.경제규모.군사력 등 여러 면에서 작은 나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나라의 크기가 곧 격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세계에서, 또는 아시아에서 어느 모로도 제일 큰 나라가 될 수 없으며 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격이 높은 일류국가 건설을 지향하고 있을 뿐이다. 결코 평탄치 않았던 오랜 역사 속에서 민족의 격과 품위를 유지하는 데 진력한 조상의 지혜와 인내력에 다시 한번 머리를 숙여야만 한다.

*** 조상들의 지혜.인내 되살려야

우리의 가장 큰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다. 자신감의 상실과 열등감의 만연은 인간적 및 사회적 여유를 고갈시키고 급기야는 격과 품위에 대한 불감증을 유행시킬 뿐, 일류국가 건설의 원동력이 될 지혜와 창의력이 무시되고 소아적 감정과 흥분이 앞서는 사회 퇴화의 증세가 가증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실패하기에는 너무나 뛰어난 민족이다. 85년 전 3월 1일을 되새기며 '미래로 돌아가는' 우리의 자세를 한번 다시 가다듬을 때 신천지는 반드시 우리 앞에 전개될 것이다.

이홍구 중앙일보 고문.前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