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그밀사 3인중1인 李瑋鐘 異域서 고난과 좌절의 인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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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구한말(舊韓末)헤이그밀사 3명중 1명인 이위종(李瑋鐘)열사가망국이후 러시아에서 겪은 고난과 좌절의 삶을 밝혀주는 자료가 근대사연구가 박종효(朴鍾涍.모스크바대)교수에 의해 대량 발견됐다. 러시아 외무부및 국방부 아르히브(문서보존소)에서 발견된 이들 자료는,李열사가 헤이그사건 이후 러시아로 들어가 일본의 갖은 압력과 회유를 뿌리치고 제1차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군에 입대해 2년 가까이 전투에 참가하는 것으로 애국의 정 열을 달랬음을 보여주는 모두 1천여장에 달하는 방대한 자료다.지금까지李열사에 관한 일부자료및 증언이 있었으나 관련자료가 대량으로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에 발견된 자료들은 러시아 외무부및 국방부 아르히브 소장자료,경찰과 상트 페테르부르크 시장.외무부 등의 비밀보고서,황실과 외무부.재무부.교통부 등의 李열사관련 전문,李열사 본인과부인의 진정서 등이다.
이들 서류는 李열사가 러시아남작의 딸 엘리자베다 발레리아노브나 놀켄과 결혼하기 직전인 1905년 10월28일(러시아 舊曆)부터 1917년 8월13일까지 13년에 걸친 것으로 러시아당국이 그를 끊임없이 감시.관찰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
예를 들면 『前대한제국 공사 이범진(李範晋)의 아들이자 왕족블라디미르 리는 방 6개를 1백20루블에 임대해 이 가운데 하나를 50루블에 세놓고 산다.그는 부인(23세)및 두딸.장인과살고 있다.
그는 아버지 생존때 월 2백50루블의 생활비(당시 장관월급 3백루블)를 받았으나 지금은 도움이 끊어져 빚을 지기 시작하고있으며 방세도 못낸다』는 자료도 있다.
또 李열사가 1911년11월12일 외무부에『저는 극빈상황에 처해 있습니다.어제 그로베가 저에게 일본대사관이 도와주겠다고 했다는 말을 전했습니다.그런 도움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수치스러운 운명을 맞느니 아버지의 뒤를 따르겠습니다』라 는 진정서도있다.(리스트 33) 朴교수는 李열사의 진정이 수차례에 이르자러시아외무부와 재무부가 황실과 상의한 끝에 특별기금에서 비밀보조금을 연 6백루블씩 3년 동안 지급키로 결정했으나 월 50루블로는 생활고를 견딜 수 없어 또다시 『외무부 임시직원은 물론이고 어디든 취직을 알선해 달라』고 요구하는등 무척이나 곤궁한생활을 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후 李열사는 러시아측에 귀화를 요청해 1913년 귀화한 왕족출신의 러시아인임을 인정받게 됐고 『외무부극동지부에 파견해 주거나 아무르지역이나 남부우수리지역 행정관에 임명해줄 것』을 요청해 고국을 그리워하는 심경을 드러내고 있다.( 리스트 58) 그러나 李열사의 희망은 『그에게 고위직을 불허한다』는 러시아 내부방침에 의해 좌절된다.李열사는 이후 상트 페테르부르크 화물역에서 임시서기로 일하다 1차대전이 발발하면서 군 입대를 청원,1916년1월 무시험으로 상트 페테르부르크소재 블라디미르사관학교 속성과정에 입학해 4개월간의 교육뒤에 소위보가 됐고 8개월뒤에 소위로 임명돼 16예비대에 배속된 후 2년 동안 참전했다. 그는 1차대전중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정확한 사망경위를 알려주는 기록들은 없다.
이와 관련해 朴교수는『1차대전중 사망장교명단에 그의 이름은 없으며 그는 내전에서 사망하거나 혁명후 군내부에 설치된 혁명위원회에 의해 처단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모스크바=安成奎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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