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년 철권통치' 수하르토 전 印尼대통령 사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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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사망한 수하르토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32년간 인도네시아를 철권 통치했던 아시아의 대표적인 독재자 중 한명이었다.

1921년 자바에서 수로 관개를 담당하던 지방 하급관리와 그의 두번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수하르토는 작은 할아버지 손에서 자랐다. 불우했던 성장 환경 때문이었을까.성공에 대한 집념이 또래들과 달랐다.성공의 열쇠는 군(軍)에서 찾았다. 그는 인도네시아를 식민 지배했던 네덜란드군에 입대했다가 얼마 안돼 일본군으로, 다시 독립군으로 변신했다.

전장의 주인이 수시로 뒤바뀌는 식민지 현실에서 그가 택한 처세와 입신의 길이었다. 지극히 현실적인 기회주의자의 이런 면모는 32년 장기 독재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가늠할 수 있는 실마리를 보여준다.

수하르토는 65년 군부의 친위 쿠데타를 이틀만에 진압하면서 권력의 중심부에 들어섰다. 독립군 경력을 기반으로 군 요소 요소에 꾸준히 자기 세력을 심어왔기 때문에 정국 혼란의 와중에 정권 탈취를 꾀할 수 있었다. 이듬해 병석의 수카르노 대통령으로부터 권력을 받아냈다.

수하르토 집권 전엔 친미도, 친소도 아닌 제3세계의 기수를 자처하던 나라가 인도네시아였다. 수하르토는 미묘한 국제정치의 흐름을 읽을 줄 알았다. 중국 공산당의 아시아 확산 위기감이 고조되던 60년대 후반 친미반공 노선으로 돌아섰다. 미국의 암묵적 지원은 장기 독재의 안전판이 됐다. 반공의 이름으로 국내 정적의 싹을 잘라버렸다.

수하르토는 권력욕의 화신이었다. 그는 연임을 거듭할 때마다 "다시는 출마 안한다""4년 뒤면 내 나이가 얼마인가.이번이 마지막이다"라며 쏟아지는 비난을 피해갔다. 하지만 98년 다시 연임을 밀어붙여 당선됐다. 7선이었다. 그에게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헌법상 대통령선출기구인 국민협의회 위원(1000명)을 측근으로 배치해 기립박수로 대통령을 선출하는‘체육관 선거'였기에 가능했다.

그는 1인 장기 집권과 아시아 개발독재의 상징이었다. 종신 대통령을 추구한 그의 야심은 성장기에 영향을 끼친 자바섬의 토속신앙이 모태였다. '자바의 왕은 신의 선택을 받은 자'라는 신념으로 죽을 때까지 권력을 손에 쥐려했다.

수하르토는 천연가스ㆍ석유 등 풍부한 자원을 기반으로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을 추진했다.집권 20년 만에 70달러였던 1인당 국민소득(GDP)이 1000달러로 뛰어올랐다. 연평균 6%를 넘는 고속 성장을 이끌며 ‘개발의 아버지’로 불렸다.이 때문에 물가폭등으로 경제 침체에 시달리는 요즘 인도네시아에선 수하르토를 그리워하는 목소리도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이런 치적 이면에는 탄압으로 얼룩졌던 어두운 역사가 있다.시한도,제한도 없는 권력이 뿌린 유혈의 역사였다.
반공을 내세워 수십만의 인명을 살상했다.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정당을 불허했으며 언론자유를 외치는 언론인을 거리로 내몰았다.

견제 받지 않는 절대 권력은 부정부패로 거침없이 나아갔다.천문학적인 검은돈이 오가는 국영 항공기 제작 기업이 그의 소유였다. 3남3녀는 천연자원 개발ㆍ자동차ㆍ석유화학ㆍ은행 등 국가 기간 산업을 장악해 국부를 가로챘다. 부인은 규모가 큰 국내 기업간 거래에 개입해 무조건 10%의 수수료를 챙겨 ‘10% 여사’라는 별명이 붙었다. 인도네시아는 ‘수하르토 주식회사’라는 냉소가 사회 전반에 흘렀다. 유엔과 세계은행은 수하르토 일가가 150억~350억달러(약 14조~33조원)의 검은돈을 축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친인척과 측근들도 인허가권과 뇌물을 주고받으며 배를 불렸다. 장기 독재는 부정부패 때문에 더더욱 포기할 수 없는 외길이었던 것이다.

부패한 족벌들의 아성은 97년 외환위기가 닥치자 빠르게 허물어졌다.루피화 폭락과 이로 인한 물가폭등으로 폭동과 반정부 시위가 잇따르자 이듬해 5월 수하르토는 최측근들에게 권좌를 빼앗기다시피 내놓았다.

몰락한 권력 앞엔 법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하르토 일가의 검은돈을 뒤쫓은 검찰은 국고 횡령 혐의로 2000년 그를 기소했다.지난해엔 대통령 재직 시절 횡령한 자선단체 기금 15억4000만달러(약 1조4200억원)를 반환하라며 민사소송을 냈다. 법원은 지병을 이유로 출석을 기피하는 그를 가택 연금시켰다.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생의 마지막 숨을 몰아 쉬던 그의 뇌리엔 어떤 생각이 스쳤을까. 절대 빈곤에 시달리던 후진국을 근대화시켰다는 자부심이었을까. 권력에 눈이 멀어 나라를 망쳤다는 회한이었을까.

정용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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